군산을 처음 찾은 건 올해 3월이었다. 군산 청년들이 제작한 지도를 매개로 한 팝업 전시 〈웰컴 군산 팝업〉 이 목적이었다. 관광지 나열에 그치지 않고 무심코 지나쳤을 법한 표지판이나 길고양이처럼 세세한 흔적까지 소개한 덕분에 처음 방문한 도시에도 애정을 줄 수 있었다. 군산을 이야기하자면 다소 진부하더라도 ‘애정’이라는 단어를 꺼내고 싶다. 고심 끝에 고른 숙소도, 거리를 걷다 우연히 들어선 서점도 모두가 지역에 대한 견고한 애정을 바탕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출렁이는 마음이 디테일로 표현된 군산의 공간들을 소개한다.
군산북페어

‘군산’이라 하면 오래된 중국집이나 멜로 영화 촬영지를 떠올리곤 했는데, 그에 앞서 ‘군산북페어’를 언급하게 되는 요즘이다. 새로운 행사가, 그것도 로컬에서 열린 북페어가 이렇게 또렷하게 각인된 건 분명 탁월한 지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군산북페어는 스스로 ‘북페어의 북페어’를 목표로 한다. 특히 이번 〈군산 북페어 2025〉에서는 뉴욕, 베를린, 도쿄 등 세계 각지 아트북페어 서른 곳을 취재해, 현대 출판 문화 속에서 북페어가 지닌 역할을 다시 묻는다. 책을 사고파는 것을 넘어, 출판의 현재와 미래를 바라보는 창으로 확장되는 셈이다.

올해는 참여 규모도 커졌다. 상업·독립·예술 출판을 아우르는 국내외 100여 팀이 군산에 모여 북마켓을 비롯해 토크, 전시, 워크숍, 팝업 등을 연다. 말 그대로 출판인과 애서가들을 위한 축제다. 특히 전시가 눈길을 끈다. 전 세계 북페어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아트 북 페어 나우ㅡ북페어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디자이너 신신(신해옥&신동혁)과 신덕호의 15년 간 작업을 집대성한 아카이브 전시 〈메이드 인 신신신〉, 리소 인쇄물 100여 점을 모은 〈리소는 아름답다〉, 군산 대표 빵집 이성당과 협업해 아름다운 노란 책들로 채운 〈노랑북스〉까지. 네 개의 전시를 모두 관람하고 스탬프를 채운 관람객에게는 아틀라스 군산이 제작한 군산영화지도를 선착순으로 증정한다.
군산회관

군산북페어가 아니더라도 군산회관(GCC)은 들러볼 이유가 충분하다. 특히 건축에 관심 있다면 필수 코스다. 최근 전라북도 우수건축자산 1호로 선정된 군산회관은 건축가 김중업의 유작으로, 서구 모더니즘을 토대로 기하학적 실험을 이어가던 그의 건축 세계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1989년 개관해 군산 시민들의 문화와 여가를 책임졌던 군산회관(당시 군산시민문화회관)은 오랜 기간 방치되기도 했지만, 임권웅 건축가의 리모델링을 거쳐 감각적인 전시와 프로그램을 선보이는 복합문화공간이 되었다. 2층에 있는 ‘카페 GCC’를 공간 투어의 시작점으로 추천한다. 다회용 컵에 담긴 음료를 받아 공연, 전시가 열리는 너른홀, 야외 테라스, 공유 오피스 역할을 겸허는 라운지 등 군산회관 곳곳을 거닐어 보자.

지린성

부산에는 밀면이 있고, 춘천에는 막국수가 있듯 군산에 오면 짜장과 짬뽕이다. 군산은 유독 중국집이 많은 도시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중국 상인들이 정착하고, 일제강점기 시절 노동자 이주로 화교 네트워크가 확장되면서 음식 문화를 키웠다. 빈해원, 복성루 같은 역사가 깊은 중국집이 많지만, 혀를 태우는 매운맛이 궁금하다면 지린성을 찾아야 한다.

열아홉 살에 중화요리의 길에 들어선 뒤 40년 넘게 음식을 만들어 온 도유덕 대표가 운영하는 곳으로 군산에 없던 고추짬뽕과 고추짜장을 시그니처 메뉴로 개발했다. 단순히 고추만 넣은 게 아니라 죽순, 표고, 매실 액기스 등 부재료를 더해 속을 덜 자극하면서도 맛의 깊이를 살렸다. 얼핏 평범한 비주얼이지만, 첫입과 동시에 땀이 맺힌다. 매울수록 ‘맛’이 중요하다는 진리를 증명하듯, 지린성의 메뉴는 뒷맛이 깔끔하고 중독성이 있다. 대기 시간이 길 경우 포장해 옆 향다방에서 먹는 것도 가능하니 참고하자.
주소: 전북 군산시 미원로 87
여력

오래된 장소를 아끼지만, 이제 막 지어진 공간이 짓는 달뜬 표정도 좋아한다. 여력은 올해 6월, 군산시 금동에 문을 연 카페다. 완벽한 결과물로 감탄하기 바쁜 시대에, 중고 시장에서 구한 모양이 제각각인 가구들과 창 너머로 보이는 초등학교 정문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훌륭한 미적 요소는 없지만, 공간에 깃든 소소한 위트와 배려 그리고 주인의 취향이 겹쳐져 둘러보는 즐거움이 있다. 입구 옆 작은 테이블은 어린이를 위한 창작 공간이다. 준비된 노트에 스티커를 붙이고 칼림바를 연주해도 된다.

군산에 자주 방문하기 어렵다면, 인스타그램을 통해 멀리서나마 애정을 쌓을 수도 있다. 서울 떠나 고향으로 내려온 순간부터 간판을 달고, 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리는 시간까지 일기장처럼 나직한 기록을 쌓아가고 있다. 여력이 남아있는 한 마음을 담아 응원하고 싶어지는 공간이다.
주소: 전북 군산시 중앙로 226 1층
모락

군산은 한때 작은 도심 안에만 열 곳이 넘는 양조장이 있을 만큼, 술로 번성한 도시였다. 모락은 그 기억을 오늘날로 잇는 공간이다. 청년마을사업 ‘술익는마을’에서 조성한 이곳은 발효술을 입욕제로 사용하는 프리이빗 목욕탕으로, 적산가옥을 개조해 구옥의 잔잔한 온기를 그대로 품고 있다. 삼나무 향이 스며든 욕실에 몸을 담그면 피톤치드가 마음을 환기하고, 군산 쌀로 빚은 술이 혈액순환을 도와 피부를 부드럽게 한다. 목욕을 마친 뒤에는 다다미 휴식 공간에서 군산 특산물로 만든 건강차가 기다린다. 오래된 도시의 뿌리와 청년들의 새로운 시도가 맞닿은 곳. 여행의 피로를 풀며 군산의 시간을 온몸으로 느껴보는 건 어떨까.
주소: 전북 군산시 구영6길 18 1층
시가지

군산 영화타운 안쪽에 있는 보틀샵 겸 라운지. 술이 좋아 군산에 정착했다는 주인이 운영해 운치와 술맛이 배가 된다. 주인이 엄선한 흔치 않은 와인을 잔으로 맛볼 수 있고, 공간 안에는 세탁기가 있어(빨래는 할 수 없다) 묘한 생활감도 더해진다. 무엇보다 이곳에서는 동네 이야기를 얻을 수 있다. 특히 술 마실 만한 곳을 소개받기 좋아 동네 사랑방이자 여행자 라운지 역할을 한다. 군산을 혼자, 그것도 처음 찾았다면 술 한잔에 여행 길잡이까지 얻을 수 있으니 이만한 곳이 없다. 안주는 따로 판매하지 않지만 외부 음식 반입이 가능하다. 주인장 왈, 근처 국밥집에서 판매하는 수육이 와인과 조합이 좋다고. 와인 한잔과 가벼운 대화로 군산의 밤에 스며들어보는 건 어떨까.
주소: 전북 군산시 구영6길 111-5
글 김기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