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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20

스튜디오 그레이의 K-POP 음반 아트워크

음반 아트워크에 담은 K-POP의 변화
스튜디오그레이가 작업한 아스트로 정규 3집(위)과 세븐틴 정규 4집. 사진 제공 스튜디오그레이

스튜디오 고민의 안서영 실장에게 좋아하는 디자이너를 물었더니 스튜디오 그레이의 나래 실장을 언급했다. 글로벌 ‘K-열풍’의 근원지 중 하나인 K-POP 산업에서 가장 눈에 띄게 활약 중인 그래픽 디자이너라는 수식과 여태까지 그녀의 인터뷰를 본 적이 없다는 설명까지 덧붙였다. 그 말에 흥미가 가지 않을 수 없었다. K-POP의 주인공은 아티스트이지만 성공 비결은 프로듀서와 비주얼 디렉터, 작곡가, 작사가, 스타일리스트 등 아티스트를 둘러싼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중 아티스트만의 독자적이고 개성적인 세계관과 이를 표현하는 앨범 콘셉트, 사회적, 환경적 이슈를 담은 앨범 아트워크는 K-POP 디자인을 구축하는 큰 영역 중 하나다. 더군다나 앨범은 아티스트와 팬이 소통하는 가장 큰 접점이기도 하다. 실제로 국내 음반 시장은 과거 음반 시장의 르네상스 시대라고 불렸던 2000년대보다 오프라인 음반 판매량이 더 높게 나타난다. 이는 K-POP의 성장과 더불어 디자인적인 마케팅 전략과 시대에 맞춰 변하는 음반 패키지 디자인, MD 구성품의 영향도 있다.

스튜디오 그레이(Studio Graey)’의 인스타그램 피드를 보면 이런 K-POP의 음반의 비주얼 흐름과 패키지 변화가 눈에 보인다. NCT와 스트레이 키즈, 아이브, EXO, 세븐틴, 몬스타 X, 아이유, 트와이스, 태연, 보아, 신화, 임영웅까지. 이들의 정규 앨범이나 싱글 앨범, 솔로 앨범, 콘서트 등의 디자인이 가득하다. 모두 스튜디오 그레이가 진행한 작업이다. 스튜디오 그레이는 국내 뮤지션의 앨범 디자인 중에서도 아이돌 앨범을 주로 디자인한다. 2010년대 초중반부터 작업해왔으니 스튜디오그레이의 포트폴리오는 실제로 K-POP 2세대 아이돌 그룹 앨범부터 4세대라 불리는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변천사를 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Interview with 나래 그래픽 디자이너

─ 본인 소개를 부탁드려요.

저는 그래픽과 타이포그래피 기반의 1인 디자인 스튜디오인 스튜디오그레이의 나래입니다. 주로 앨범 디자인 작업을 하고 있어요.

─ 여러 그래픽 디자인 중에서도 앨범 디자인을 주로 맡게 된 계기가 있나요.

제 첫 직장은 S/O PROJECT예요. 재학 시절에는 게임 회사나 인터랙티브 디자인, 영상 쪽에 관심이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정말 좋아하는 교수님이자 지금은 고인이신 조현 교수님이 S/O PROJECT 인턴으로 불러서 방문했는데 디자인 스튜디오의 자유분방함에 완전 매료됐어요. 그때가 2009년이에요. 제가 원래 혼자 밤새우며 작업하는 스타일이었는데 그런 분위기마저 너무 좋아 보였어요. 제가 딱 원했던 생활이었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덜컥 입사했고 일한 기간도 짧았지만 정말 많은 걸 배웠어요. 이후에 S/O PROJECT 팀장으로 있던 이지윤 실장이 독립하면서 스튜디오XXX에서 2년 정도 같이 일하다 그만뒀죠. 이후에 저도 독립해서 스튜디오 그레이를 시작했어요. 앨범 디자인은 스튜디오 XXX에서 앨범 재킷을 주로 작업하면서 저와 잘 맞은 걸 깨달았어요. S/O PROJECT는 SK텔레콤이나 현대카드 같은 기업의 애뉴얼 리포트처럼 스토리텔링이 중요한 디자인을 하는 회사라 의미가 깃들어야 하는데 제가 그걸 너무 못하더라고요. 보자마자 한눈에 그럴싸하게 들어오는 디자인이 제게 맞았죠. 엔터테인먼트 관련 디자인이 그렇잖아요. 깊은 의미보다 잠깐 스쳐 지나가도 시선을 끄는 컨셉추얼한 디자인에 가깝죠.

─ 최근에 진행한 작업도 알려주세요.

스트레이 키즈 정규 3집, 세븐틴 정규 4집, 아스트로 정규 3집, 아이브 싱글 3집, NCT 2023, 아이유 싱글, 보아 미니 3집, 메이브 미니 앨범, 엑소 시우민 솔로, 신화 유닛 등의 앨범을 디자인했어요. 잘 모르는 아이돌도 있죠? 그중에서 스트레이 키즈 앨범이 엄청 잘 됐어요. 엔터테인먼트사에서 신기록 세웠다고 연락이 왔어요. 초도 물량이 BTS와 세븐틴 기록을 넘었어요. 스트레이 키즈는 국내보다 해외에서 인기가 더 높아요. 아티스트의 콘서트 DVD&블루레이 패키지도 작업해요. 더보이즈 콘서트를 했고, 올해 성수에서 진행한 NCT 꼬마즈 그로서리 스토어 로고와 플라이어, 디즈니플러스의 NCT 다큐멘터리 포스터 작업도 했어요. ‘아이스크림iScreaM 프로젝트’라고 SM엔터테인먼트 산하 EDM 레이블인 ‘스크림 레코즈ScreaM Records’가 진행하는 리믹스 음원 공개 프로젝트가 있어요. 관련 디자인도 하고, 네이버 바이브의 추천 플레이리스트 일러스트 작업도 일부 진행해요.

NCT CCOMAZ 그로서리 스토어 로고&플라이어. 사진 제공 스튜디오그레이

─ 최근 1년간의 작업만 해도 상당하네요.

사실 죽을 것 같아요. 고사도 많이 하고, 업무량을 조절하는데도 엔터테인먼트 관련 프로젝트는 워낙 촉박하게 돌아가서 일을 급하게 맡는 경우가 잦아요. 늘 예상보다 더 많은 일을 하게 되죠.

─ 스튜디오그레이를 알게 되면서 놀랐던 부분이 두 가지 있어요. K-POP을 대표하는 유명 뮤지션들의 수많은 앨범을 디자인한 포트폴리오에 놀랐고, 온라인에 홈페이지를 제외한 정보가 이렇게 하나도 없을 수 있다는 점에 놀랐어요.

디자인프레스가 제 첫 인터뷰예요. 지금까지 몇 차례 인터뷰 요청이 있었지만 모두 고사했죠. 제가 디자인은 했지만 그 앨범 작업의 대표로 인터뷰를 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 들었어요. 다들 앨범의 콘셉트나 세계관 디자인을 궁금해하는데 그 부분은 디자이너의 영역이라기보다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기획 단계에서 정해지니까요. 제가 참여하는 부분은 아니거든요. 저는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만 올리는 느낌이랄까요. 저는 ‘이런 콘셉트이니까 여기에 맞춰서 해주세요’라고 하면 아웃풋을 뽑아내는 정도예요.

스튜디오그레이의 앨범 아트워크들. 사진 제공 스튜디오그레이

─ 지금에 이르게 된 계기가 된 초창기 작업은 어떤 것들이 있나요.

사실 스튜디오 XXX 시절까지는 외부 활동이 전혀 없었어요. 당연히 엔터테인먼트 담당자와 관계도 전혀 없었죠. 그만두고 월간 <COFFEE>를 맡아서 그 상태로 2년 정도 지냈어요. 그런데 신화를 담당했던 이사님이 저를 기억하고는 연락이 왔어요. 역시 비슷한 상황인데 CJ ENM 담당자가 SM엔터테인먼트로 옮기면서 제게 연락을 했어요. 제가 HOT 팬이었고, SM 엔터테인먼트를 좋아하는데 마침 소녀시대 10주년 팬미팅 포스터를 맡았어요. ‘걸스 제너레이션 10th 애니버서리 홀리데이 투 리멤버(GIRLSGENERATION 10th Anniversary – Holiday to Remember)’라는 행사의 포스터예요. 무엇인가 기억할 때 손가락에 끈을 감는 의미를 담아 아티스트와 팬이 연결되어 있다는 걸 포인트로 작업했어요. 그 포스터 작업을 보고 비주얼 팀에서 연락이 왔죠. 그때부터 제 앨범 디자인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어요. 아, 그리고 BTS가 방탄소년단이던 초창기에 사용한 로고 중에서 방패 조끼 디자인을 제가 했어요. 로고 타이포그래피는 다른 유명 디자이너가 했고요.

─ 아무래도 아티스트 성향이나 회사별 업무 스타일이 있어서 엔터테인먼트 기업의 디자인 작업 스타일에 차별점이 있다면요.

제가 큰 엔터테인먼트 회사 위주로 일을 하고 있어요. 그 이유가 있어요. 저는 혼자 일해요. 만약 중소 기획사의 소위 ‘중소돌’ 작업을 맡으면 일단 기획부터 콘셉트, 실무, 디자인까지 모두 제가 고민해야 할 경우가 더러 있어요. 기획 자체를 제가 맡게 되는 거죠. 그런데 SM이나 하이브, JYP는 처음부터 확실한 기획이 있어요. 우리는 이런 촬영을 할 예정이고, 이런 룩을 입고, 이번 앨범 노래 장르나 스타일은 이렇다. 그래서 디자인도 이런 방향을 감안해서 이렇게 나왔으면 좋겠다. 명확하잖아요. 저는 그런 방향성을 받고 디자인만 하면 돼요. 저한테는 도리어 이런 작업이 편해요. 물론 어떤 디자이너는 자신의 의견이 더 반영되어야 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방향이 있기도 하죠. 다만 이런 성향의 디자이너는 이 분야의 디자인 작업과 상성이 안 맞아요. 저는 명확한 방향이 있으면 그 방향에 맞춰서 하는 작업이 재밌고 즐겁고 편해요.

─ 그러면 콘셉트를 알고 나서 작업할 때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앨범 디자인은 포스터처럼 큰 면적이 아니라 작은 면적으로 시선을 사로 잡아야 하잖아요. 별도의 접근법이 있을까요.

아무래도 커버 디자인이죠. 비주얼적으로나 그래픽적으로나 얼마나 완성도 있게 나오느냐. 아웃풋이 어떻게 되느냐를요. 저는 클라이언트 입장에서 많이 생각해요. 어떤 디자인을 좋아할까, 이런 형태를 원하나? 이런 고민에 초점을 맞춰요. 물론 저도 디자이너고 앨범 디자인을 오랫동안 했지만 아티스트와 앨범의 완성도를 높이는 방향을 정확하게 아는 건 클라이언트니까요. 물론 팬이 좋아하는 방향도 있어요. 참고하죠. 하지만 팬은 다양하잖아요. 수많은 의견을 모두 수용할 수는 없죠.

'아이유 시즌 그리팅 2023'(위)과 '아이유 다큐멘터리 조각집: 스물아홉 살의 겨울' 디자인과 구성품. 사진 제공 스튜디오그레이

─ 아이유(IU)의 앨범 작업을 많이 했던데 이럴 때는 디자인 작업이 이전 앨범과의 연결성을 고려하나요.

음, 아이유는 특별한 케이스예요. 앨범 디자인을 위한 미팅을 직접 해요. ‘저는 이번 앨범에 이런 형태로 완성하고 싶다. 색깔은 이런 계열, 전체 느낌은 이런 스타일이면 좋겠다.’ 이렇게 아주 확실하게 제시해요. 그럼 전 또 제 나름대로 여러 안으로 작업해서 보여주면 본인이 직접 고르죠. 이후로는 수정도 거의 없어요. 그냥 톡톡 바꾸는 느낌 정도? 다른 아티스트의 경우에는 요즘 앨범마다 콘셉트가 확 바뀌어서 이전 스타일을 많이 피하는 경향이 있어요.

─ 그렇다면 기획사에서 방향을 정해주면 실장님이 나머지를 모두 꾸리는 거군요. 그리고 아이돌의 앨범 디자인은 후가공이 꽃이라는 느낌도 들 정도였는데 지금은 어떤가요.

그렇죠. 어떤 레이아웃으로 어떻게 글자를 쓰고, 어떤 후광을 먹이고 그런 부분을 제가 제안하죠. 회사마다 스타일이 너무 다르니까 디자인할 때 당연히 후가공을 고려해요. 사실 후가공은 제작 견적에서 굉장히 큰 부분이잖아요. 제가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에요. 별색 하나만 올려도 몇천만 원이 추가되죠. 그래서 제안만 해요. 앨범 구성품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부터 열까지 다 정해주는 회사도 있고, 커버 이미지 방향만 알려주는 곳도 있죠.

 

아이유의 경우는 커버 판형이나 후가공, 구성품을 제가 100% 다 제안해요. 아이유 본인이 앨범의 컨셉추얼한 방향을 알려주면 제가 세부적인 부분을 제안하죠. 처음 진행한 아이유 앨범 작업이 ‘러브 포엠’이었어요. 첫 미팅 때 시집으로 보일 만한 형태를 제게 추천해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책 판형 크기에 띠지가 있고 책갈피가 들어가면 좋겠다고 제안했어요. 아이유가 책갈피 밑에 꽃 모양이 있으면 좋겠고, 파란색 띠지형 겉표지를 걷으면 회색의 양장본 표지가 나왔으면 좋겠다는 내용을 주고 받았죠. 여기에 여러 구성품을 제안하면 또 본인이 골라요. 2021년에 발매한 ‘조각집’이 그렇죠. 일반적인 형태의 음반이 아닌 다큐멘터리 ‘조각집 : 스물아홉 살의 겨울’의 구성품으로 발매했는데 이 앨범이 팬들에게 들려준 적은 있지만 세상에 내놓지는 않았던 자작곡을 모은 음반이에요. 정규 발표곡 사이사이에 만든 조각을 모아서 만든 거죠. 이 앨범을 가지고 미팅할 때도 본인이 지금까지 한 걸 다 모으고 싶다고 알려줬어요. 그래서 자료를 스크랩해 모아온 느낌의 바인더를 제안했어요. 이름도 조각집이잖아요. DVD와 블루레이가 들어 있고, 20대 때 사진을 콜라주해 얼굴을 완성했죠. 팬은 각각의 사진이 어느 시절인지 다 알거든요. 포토북과 인터뷰집, 지금까지 발매한 앨범을 포토카드로 만들어서 사진집처럼 넣었고, 열에 반응하는 잉크인 시온 잉크로 숨겨진 메시지를 넣었어요. 한때 모든 앨범에 들어가기도 했던 구성품이죠. 여기에 접지 포스터와 클립까지 들어갔죠.

아이유 '조각집' 커버 디자인. 사진 제공 스튜디오그레이
최고의 결과를 향한 최선의 질주

디지털 음원 시장이 성장하면서 2000년대 음반 시장은 불황을 맞았지만 다시 활성화된 계기가 있다. 바로 국내 아이돌 산업의 성장이다. 이 산업이 성장하면서 이전과 달리 K-POP의 앨범 디자인은 음반 아트워크 하나로만 이뤄지지 않게 됐다. 이후 앨범 디자인은 심미성과 독창성을 가진 아트워크 외에도 앨범의 형태와 크기, MD 구성품으로 이뤄진 음반 패키지 영역도 포함한다. 음악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던 과거와 달리 앨범이 팬과 소통하는 주요 창구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NCT 골든에이지 정규 4집 앨범(위)과 시우민 첫 솔로 앨범 디자인과 구성품(아래). 사진 제공 스튜디오그레이

─ 그러고 보니 일반적인 뮤지션과 달리 아이돌 앨범은 구성품이나 기타 요소가 엄청 많잖아요.

셀 수 없어요. 그룹 멤버가 20명이면 각자 앨범 디자인이 있기도 해요. 모든 멤버의 앨범을 구매해서 연결할 수 있게요. 뿐만 아니라 같은 디자인도 종류가 여러 가지죠. 일반적으로 특별판, 한정판, 일반판, 디지팩이 있어요. 일반판도 A, B, C 버전이 있을 때가 있고, 여기에 유통 경로 버전까지 더하면 난리가 나죠. 위버스 버전이나 미국이라면 아마존, 반디앤루니스, 월마트 버전 등 정말 많아요. 적게는 3~5종이 나오지만 많을 때는 앨범 하나에 23종이 나올 때도 있어요. 그 외에도 구성품이 앨범마다 다르죠. 일병 ‘포카’로 불리는 포토카드도 뒷면에 변화를 줘요. 제가 작업한 세븐틴 앨범 구성을 보면 CD, 필름 메시지, 필름 스티커, 카드 엽서, 포토카드 72장 중 랜덤 3장, 조금 다른 디자인의 엽서, 가사집, 포토북이 들어가요. 포카를 모으려고 앨범 여러 장을 사는 친구도 있죠. 그래서 목업을 굉장히 많이 구매해둬요. 앨범 발매 전에 디자인이 이렇고, 구성품은 이렇다고 미리 보여주는 예약판매 이미지가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그 이미지를 보고 팬들이 구매하니까요. 실제 구성과 최대한 비슷해야 하죠. 아직 나오지 않은 제품이라 사진을 찍을 수 없으니까 다양한 목업이 필요해요. 더 풍성하게 보이도록요.

300~400페이지 분량의 단행본 디자인은 긴 분량을 긴 호흡으로 작업한다면 앨범 디자인은 그 작업을 한 달로 압축해서 작업하는 느낌이에요. 글자 수정처럼 디자인을 조금씩 조금씩 변경하죠. 그게 저한테 잘 맞아요. 똑같은 작업을 계속 수정하는 것보다 디자인을 조금씩 변경하는 게 재밌어요.

스튜디오그레이의 음반 아트워크와 앨범 패키지 디자인. 사진 제공 스튜디오그레이

─ 별색과 홀로그램이 아이돌 앨범의 상징일 때도 있었잖아요.

예전에는 그랬어요. BTS 초창기 때는 무조건 금박이나 은박, 홀로그램박을 사용했죠. 이전에도 그랬어요. YG가 빅뱅 앨범을 플라스틱 케이스로 제작할 때는 충격이었죠. 눈에 띄어야 하니까요. 요즘 많이 바뀌었어요. 후가공보다는 디자인에 더 많이 신경 쓰죠. 앨범이 너무 많은 쓰레기를 배출한다는 이미지를 탈피하려고 환경 이슈도 많이 고려해요. 플라스틱 대신에 친환경 종이나 콩기름 잉크를 사용하고, 부피도 줄이려고 노력해요. 앨범을 수출할 때 부피가 크고 무거워지면 선박에 싣는 앨범 수량이 줄잖아요. 유통비도 올라가고요. 앨범이 콤팩트해지는 대신 디자인 밀도가 높아졌어요. 박스 형태의 앨범보다 포토북 형태나 QR코드가 들어간 포토카드 한 장으로 구성하죠. 심지어 세븐틴 앨범은 환경을 고려해서 코팅도 안 했어요.

 

예전에는 구조를 짜는데 시간을 할애할 때가 많았어요. 앨범 박스에 투명 슬리브를 사용해서 내용물을 보이게 할까, 아니면 자석을 달아서 여는 형태로 할까, 박스에 파티션을 넣을까, 접거나 끼는 형태로 만들까 고민했죠. 키 링부터 시작해서 플라스틱 굿즈도 많이 담았죠. 특히 콘서트 DVD가 그랬는데 요즘은 단순하게 책자 형태를 선호하는 추세죠. 굿즈가 들어가면 수급이 불안정해요. 인쇄소 뿐만 아니라 제작공장 일정까지 조율해야 하잖아요.

─ 앨범에 주로 쓰이는 인물 사진에도 변화가 있을 것 같아요.

예전에는 무조건 얼굴이 잘 보이고 컬러로 인쇄했죠. 얼굴이 잘려도 안 됐어요. 이제는 그런 금기가 없어요. 사진이 아예 없는 디자인을 선호하는 곳도 있어요. NCT나 세븐틴처럼 멤버가 너무 많으면 인물을 커버에 잘 안 넣게 되거든요. 멋있는 얼굴보다 분위기가 잘 표현될 수 있는 사진 위주로 쓰기도 하죠. 생각해 보니 엘리펀트라는 디자인 스튜디오에도 일했는데 그때를 생각하면 민희진 어도어 대표가 활동하기 전까지 앨범 디자인은 아는 가수가 부탁하면 디자이너가 돈도 거의 안 받고 해주는 느낌이었어요. 이제는 과거와 달리 앨범 디자인의 위상이 많이 올라갔어요. 외국 사람들에게 K-POP 디자인은 아티스트의 가공된 이미지가 포함되기도 하지만 실물로 접하는 건 앨범 디자인과 굿즈가 거의 전부니까요. 그래서 엔터테인먼트사에서 디자인을 엄청 신경 쓰죠. 실제로 디자인이 좋아서 잘 팔린다는 이야기도 들어요.

스트레이 키즈 정규 3집 〈★★★★★5-STAR〉 사진 제공: 스튜디오그레이

스트레이 키즈가 6월 2일 발매한 세 번째 정규 앨범 제목은 <★★★★★5-STAR>다. 발매일 기준 일주일 동안의 음반 판매량을 집계하는 한터차트 기준 초동 461만7,499장을 기록했다. 이는 K팝 음반 역대 초동 신기록이다. 종전 기록은 455만214장의 세븐틴이 보유하고 있었고 방탄소년단의 337만8,633장이 2위 기록이었다. 서클 차트의 집계에서도 누적 판매량 500만 장을 돌파해 펜타 밀리언 인증을 획득했다. JYP엔터테인먼트 최초의 밀리언 셀러이자 더블과 트리플을 모두 갈아치운 기록이다. 이 앨범의 디자인을 스튜디오 그레이가 맡았다.

─ 아까 스트레이 키즈 앨범이 앨범 초동 판매 기록을 경신했다고 들었어요. 요즘 같은 시대에 500만 장이라니 놀랍네요. 그 작업 이야기도 궁금해요.

올해 6월에 나온 앨범이니 그보다 더 팔렸을 거예요. 스트레이 키즈는 한국적인 느낌에 초점을 맞췄어요. JYP에서 콘셉트를 이미지로 보여주면서 궁서체 같은 한국적인 스타일로 디자인해달라고 했어요. 사진도 을지로 상가 같은 장소에서 촬영하고, 뮤직비디오도 그래요. 이런 기본 콘셉트와 촬영한 사진을 미리 전달해 주면 제가 여러 형태를 제안하죠. 앨범 이름이 <★★★★★>였고, 타이틀곡도 ‘특S-Class’이었죠. ‘특’이라는 한글과 영어 제목인 ‘S-Class’도 혼용해야 해서 타이포그래피는 궁서체와 인장 디자인을 최대한 활용했어요. 스트레이 키즈 세계관에 등장하는 용도 S자로 그렸고, 패턴도 한국적인 무드를 위해서 창살에 주로 쓰이는 전통 문양을 썼어요. 타이틀곡 안무에 ‘기역니은’ 댄스가 있다는 점에서 착안했죠. 한정판은 컬러로, 일반판은 흑백으로 디자인했어요. 약간 차별화했죠. 이 앨범 디자인의 평을 보면 호불호가 갈리는데 그래도 판매는 많이 됐어요.

 

─ 생각해 보니 500만 장이나 찍을 수 있는 인쇄소도 흔치 않겠어요.

국내에 규모가 큰 인쇄소가 세 군데 정도 있어요. 옛날에는 경쟁 때문에 물량을 몰아주는 기획사의 앨범만 맡다가 이제는 물량이 너무 많은 그룹이 생기면서 버전에 따라 나눠서 찍어요. 구성품도 많은 데다 100만 장 이상 넘어가면 한 인쇄소에서 소화하기 힘들거든요.

─ 작업할 때 제약이나 한계에 부딪힐 때가 있을까요.

저는 매일매일 비슷한 작업을 계속해요. 디자인은 매번 다르지만 작업 과정에는 큰 차이가 없어요. 개인적으로 그리드 디자인을 선호해요. 아이돌 앨범은 그리드를 사용하기 힘들어요. 아이돌이니만큼 자유분방한 디자인이 우선되니까요.

VIBE 추천 플레이리스트 일러스트레이션 작업. 사진 제공 스튜디오그레이

─ 15년 가까이 앨범 디자인을 했으니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 같아요.

제가 작업을 강제로 쉬었던 적이 있어요. 진짜 열심히 할 수 있는데 일이 안 들어왔어요. 2~3년 동안 굉장히 잔잔하게 일했죠. 너무 지루하고 힘들었던 시간이라 굉장히 바쁜 지금이 너무 좋아요. 힘들기도 하지만 언제까지 일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지금은 즐기고 있죠. 다만 간간이 앨범 외에 다른 일이 들어오긴 하지만 병행에서 오는 스트레스 때문에 무서워서 못하겠어요. 이 분야가 워낙 타이트하게 흘러가서요. 네이버 바이브의 플레이리스트 일러스트레이션 작업도 하는데 매달 정기적으로 작업해서 힘든 감이 있어요. 갑자기 중간에 앨범 일정이 끼어 들어오면 멘붕이 오거든요. 그래도 그림 그리는 게 익숙하지 않지만 재밌기는 해요. 접근법도 다르고 ‘카페에서 듣는 로우파이’, ‘공부할 때 듣는 로우파이’처럼 디테일한 플레이리스트 제목이 오면 콘셉트부터 모두 제가 진행하거든요.

─ 앞으로의 계획을 말해주세요.

제가 지금 일을 굉장히 많이 하고 있어요. 회사를 차릴까 그러면 이 일을 10년 넘게 할 수 있나, 그냥 혼자 할까 계속 고민이 들어요. 평소에는 3~4개 정도, 많을 때는 6~7개의 프로젝트를 혼자서 진행하거든요. 정말 바쁘게 살고 있어요. 머리가 항상 쌩쌩하게 돌아가는 게 아니니 울면서 일할 때도 많죠. 오늘도 3시간만 자고 출근했어요. 일하다 보면 초인적인 힘이 필요할 때가 늘 오고 그 순간 힘을 쥐어짜죠. 일이 그렇게 만들어요. 저는 작가가 아니에요. 엄청 상업적인 디자인을 하죠. 저의 최종 목표는 저한테 일을 준 사람이 프로젝트를 잘 끝낼 수 있게 만드는 거예요. 일을 준 사람이 그 프로젝트를 진짜 진행하는 사람이잖아요. 당연하게도 그 사람이 원하는 바를 최대한 구현해서 최고의 퀄리티를 내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요. 저는 후회 없이 항상 최선을 다하거든요.

스튜디오그레이 나래 디자이너. 사진 제공 스튜디오그레이

안상호 기자

취재 협조 및 자료 제공 스튜디오그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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