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with 애슝
— 지난번 팝업 전시 이후로 몇 주 만에 만났어요. 행사는 잘 마쳤나요? 반려동물을 그려주는 이벤트가 매우 인기가 좋았을 것 같은데요.
많은 분이 관심을 가져 주시고 좋아해 주셔서 잘 마쳤어요. 그동안 일이 너무 많아서 중간에 리프레시할 계기가 필요했거든요. 그게 저에게는 이번 팝업이었어요. 너무나 바빴기 때문에 차일피일 흘러가던 계획을 더 이상 미루지 않고, 시간을 딱 비워뒀어요. 새로운 굿즈를 만들다 보니 또 욕심도 생겨서 이것저것 시도하며 즐거웠어요. 전시가 열렸던 셀렉숍인 ‘얼띵’과는 예전에도 마켓을 함께 한 적이 있는데요. 그때 오신 손님들을 가볍게 그려주는 이벤트를 했었어요. 그 추억이 떠올라서 이번에는 <고양이 생활>이라는 책이 나왔으니까 손님들의 반려동물을 그려주는 걸로 한 거죠. 한분 한분 소중하게 그림을 들고 가는 모습을 보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어요.
— 전시장에 틀어둔 짧은 애니메이션이 인상 깊었어요. 알고 보니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애니메이션을 전공하셨다고요. 일러스트레이터가 된 계기가 있었나요?
애니메이션 고등학교를 다녔고, 대학교에서도 애니메이션을 전공했어요. 일찍부터 애니메이션을 전공으로 배우다 보니 오히려 졸업 무렵엔 문득 다른 걸 해보고 싶더라고요. 디자인 회사에 취직해 한동안 회사 생활을 했습니다. 몇 년간의 회사 생활을 정리하고 일본에 머문 적도 있는데요. 놀려고 했는데 본의 아니게 취직이 되어서 광고 팸플릿 같은 것을 디자인하면서 지냈습니다. 일하고 남는 시간엔 개인 작업을 했어요. 작업이 모이니까 이걸로 뭔가를 만들어 보고 싶어지더라고요. 2011년, 한국에 와서 처음 작은 ‘진(ZINE, 소규모 출판물)’을 만들어 봤어요. 그때 애슝이라는 이름을 처음 쓰게 됐고요. 이후 지금까지 이렇게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 작가명인 ‘애슝’에는 어떤 뜻이 있나요?
아무 뜻 없어요. 처음부터 일러스트레이터를 해야 되겠다, 작가를 해야겠다 그런 생각이 없었거든요. 제 안에 있는 얘기를 하고 싶은데 뭘 내려면 작가명이 있어야 하겠더라고요. 본명을 쓰고 싶진 않아서 그냥 가볍게 시작했던 거였습니다. 바꿀 타이밍을 놓치기도 했고, 다들 좋아해 주셔서 지금까지 쓰고 있는 저의 또 다른 자아입니다.
— 2014년 <리드 앤 리듬>이라는 에세이 형식의 만화책을 낸 뒤, 지금까지 <어느 날의 먼지>, <숏 컷(Short Cut)>, <페페의 멋진 그림>, <문장수집가, 스테레오>를 냈고 가장 최근에는 그림 산문집 <고양이 생활>을 발표했어요. 그중 2016년 나온 <숏 컷>은 작은 에피소드가 단편처럼 묶인 흥미로운 책이네요.
<숏 컷>은 작업에 전환점이 된 책이어서 저한테도 각별해요. 그림 스타일에 대해 많이 고민할 때였거든요. 당시 유어마인드에서 소규모 출판물들을 기획하는 행사를 만들었는데 거기에 참여하면서 스스로 많이 발전했다고 느꼈어요. 평소에 했던 생각들을 정리할 수 있는 계기도 됐고요. <숏 컷>을 통해 저를 기억하는 분도 많아요. 일본에서도 판매가 많이 됐거든요. 이 책은 다양한 스타일을 보여주는 옴니버스 스타일의 책이에요. 여기에 소개된 페페는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그림책 <페페의 멋진 그림>(창비)으로 발간되었죠. 원래는 콘셉트만 있던 캐릭터였는데 그대로 하나의 완성물이 되었어요. 페페처럼 이때 아이디어들이 하나하나 연결되어 다음 작업으로 뻗어나간 경우가 많아요.
“
오늘도 그리고 싶은 게 너무너무 많은 페페는 나무 아래 기대 앉아 스케치북을 펼쳤어요.
<페페의 멋진 그림>(창비) 중에서
”
— <페페의 멋진 그림>은 그림뿐만 아니라 글도 직접 썼어요. 이야기를 만드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어떻게 작업했나요?
저도 쓰면서 내가 쓰는 이야기를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도 많았는데요. 신기하게도 책이 나오고 나서 사람들이 글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시더라고요. 내용이 이랬다, 이런 부분은 좋았다… 제가 쓴 이야기를 알아봐 주신다는 게 정말 좋았고, 그림책의 세계는 신기하다는 걸 깨달았죠. <페페의 멋진 그림>은 디지털로 작업한 게 아니라 직접 다 아날로그로 그림을 그린 거예요. 그래서 정말 시간과 공수가 많이 들었죠. 내년에 다음 책을 만들려고 하는데요. 작업량이 많으므로 시간을 많이 비워놔야 해요.
— 애슝 작가의 그림은 따뜻하고 사려 깊은 느낌이 있어요.
나와 가까이 있는 것을 그리려고 해요. 나와 먼 주제에 관해서 그림을 그려야 한다면 상상도 잘 안되고 자신도 없어지니까요. 내가 관심 있는 것을 그려야 몰입이 잘되고 스스로 계속 작업을 다시 보면서 피드백을 얻기도 해요.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작업을 통해 이겨내는 경우가 있는데, 예전에 했던 작업을 보면 그때 기억이 다시 나곤 하죠.
— 나 자신을 향한 시선도 있는 거군요. 고양이를 그리게 된 이유는 따로 있나요?
원래 고양이를 좋아했어요. 고양이라는 동물 자체에 관심이 있다고 해야 할까요. 그러다 2017년 우연히 뮤뮤를 만나서 기르게 되면서 그게 더 극대화가 된 거 같아요. 지금도 가끔 뮤뮤를 만나지 않았다면 인생이 어땠을까, 분명 지금과 정말 달랐겠구나 하고 생각해요. 아마 <고양이 생활>은 나오지 않았을 수도 있겠죠.
— 뮤뮤는 하얀 고양이잖아요. 검은 고양이 캐릭터가 애슝 작가의 캐릭터처럼 보일 때가 있는데, 이 고양이는 누군가요?
맞아요. 그럴 수도 있어요. 얘는 스테레오라는 고양이예요. 역시 <숏 컷>에서 처음 구상하게 된 캐릭터인데 약간 제 자아와 닮은 구석이 있긴 해요. 회사를 다니는데 취미로 음악을 하는 고양이, 창작 활동도 하고 명상하는 고양이, 친구랑 밴드도 하고 취미 생활도 즐기는 자유분방한 캐릭터죠.
— 작업을 한 지 10년이 넘었어요. 그간 작업했던 일 중에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정말 많은데 네이버 스페셜 로고 제안이 왔을 때 매우 기뻤어요. 두 번 의뢰가 왔는데 몹시 즐겁게 작업했어요. 평소 내가 쓰던 포털에 내 그림이 걸리니까 신기했죠. 그리고 2017년 할리스 커피 다이어리 표지! 지금도 업무 미팅에 가면 종종 회자되는 작업입니다. 브랜드와 협업하면서 제 그림이 매장 쇼윈도에 크게 구현되기도 하고, 한 시즌의 옷으로 나오기도 하고. 일러스트레이터로서 경험할 수 있는 많은 일이 있는데 이걸 하나씩 해보게 될 때 즐거움이 있는 것 같아요.
애슝의 협업 프로젝트
할리스 커피(HOLLYS COFFEE), 2017
29CM와 함께 할리스커피 20주년 기념 다이어리 커버 일러스트 작업을 진행했다. 동명의 소설과 영화 <오만과 편견>에서 영감을 얻어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티 테이블, 새 등을 커피와 함께 그려냈다.
에잇세컨즈 아티스트 컬래버레이션 21SS(8 Seconds Artist collaborations 21ss X Ae Shoong), 2021
에잇세컨즈와 함께 ‘Stay (C)at Home’을 주제로 집 안에서 즐겁고 편안한 시간을 보내는 고양이들의 모습을 풀어낸 그림을 담아 21SS 콜렉션 컬래버레이션을 진행했다.
크리니크 코리아(Clinique Korea Happy Holiday), 2021
크리니크 코리아의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위한 그림. 트리의 오너먼트를 그리며 마음이 간질거려서 그림을 그리다 잠시 멈췄던 순간을 기억하고 싶었다. 커다란 트리 장식을 꾸며보는 것이 소원이 되어버렸는데 그림으로 대리만족을 이뤘던 작업이기도 하다.
— <고양이 생활>에서는 뮤뮤와 함께하는 일상뿐만 아니라 작가로서, 도시 생활인으로서의 고군분투기도 담담하게 이야기하죠.
예전에 얇은 진을 만들 때는 일기 같은 글도 많이 수록했었어요. 점점 그림이 주가 되다 보니까 글을 보여줄 기회가 없어지더라고요. 글을 쓰더라도 어떤 타이밍에 어떻게 보여줘야 할지 모르겠고요. 그러면서 시간이 계속 흘러가고 있었는데 우연히 제가 쓴 짧은 글들을 보고 책을 내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걱정을 많이 했어요. 제 얘기를 과연 사람들이 좋아할지 몰랐거든요. 짧은 글을 세 편 편집부에 보냈고, 반응이 좋아서 지금의 책까지 나오게 됐어요. 물론 고양이 생활이라고 해서 고양이 얘기만 나오지는 않는데요. ‘나는 고양이만 계속 나왔으면 좋겠는데’ 이런 분들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고양이라는 존재가 함께하는 저의 이야기거든요. 처음부터 ‘고양이 그리고 생활’ 인 것이죠.
— 이 책을 보면서 상황은 다르지만 사회초년생 때가 떠올랐어요. 지금 20대와 30대 초반을 지나는 사람들은 분명 비슷한 고민들을 할 것 같아요.
여기 나온 이야기들이 마냥 밝지만은 않아요. 저의 개인적인 생각들을 눌러 담았고 그래서 산문집이라고 이름 붙인 거였어요. 삼십 대를 겪으면서 마주하는 인생의 쓴 부분도 있는데 매일 살아가며, 작업하고, 고양이와 눈 맞추며 제 나름대로 정화해 나가는 거죠.
— ‘고양이는 무엇이든 될 수 있어’라는 문장이 뇌리에 콕 박혔어요. 어떤 뜻이 있나요?
사람들은 보통 고양이를 보고 ‘도도하다’라고 많이 표현하는데요. 저는 ‘도도’보다는 ‘당당’이라는 표현을 쓸래요. 왜냐면 뮤뮤를 보면 굉장히 주체적이거든요. 자기 생각을 확실하게 표현하고, 싫어하는 건 딱 거절하고. 그 모습이 당당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난 뭐든 될 수 있어’라는 문장이 떠올랐나 봐요. 뮤뮤의 얼굴을 다른 사물에 대입해 봤거든요. 핸드폰에도 놔보고, 꽃 대신 놔보고, 책에도 놔보고 근데 다 그럴듯해 보였어요. 그래서 그런 생각을 한 것 같아요. ‘고양이는 다 될 수 있는 존재구나’하고요. 그 당당함이 부럽기도 하고요.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 (웃음)
— 책을 내고 변화한 점이 있나요?
독자들의 후기를 보는 기쁨에 빠졌어요. 글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기록을 굉장히 잘하시더라고요. 제 책을 읽고 감상을 개인 블로그 같은 데 올려주시는데, 그런 후기를 찾아 읽는 소소한 재미를 느끼고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피드백을 받은 건 처음이라 신기하기도 하고요.
— ‘내가 매일 하는 일이 나를 만든다’라는 말이 있죠. 하루를 견고하게 만드는 나만의 리추얼이 있다면?
일상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나만의 체크리스트가 있어요. 근데 이걸 꼭 다해야만 하는 건 아니고, 만약 다섯 가지 중에 세 가지를 해도 셀프 칭찬해 주는 거예요. 오늘도 크게 흐트러지지 않은 일상을 보냈다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식물에 물주기, 청소하기, 머리 빗기, 산책하기 등 사소하지만 만족감이 드는 일에 소중함을 느껴요. 뮤뮤에 관해서 만큼은 꼭 시간을 내려고 해요. 단순한 일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뮤뮤와 놀이하는 30분에서 1시간은 오롯이 서로 교감하는 시간이고 일상의 큰 리추얼 중 하나죠.
— 앞으로 계획하는 것들이 있다면?
새로운 작업실 공간을 계획하고 있어요. 그곳에서 채워나갈 새로운 시간이 기대됩니다. 그리고 내년에는 미뤄두었던 그림책 작업을 천천히 진행해 볼 예정이에요.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인생은 불안과의 사투가 아닐까 싶은 정도로 험난하지만, 불안 속에서 어떻게든 삶을 지켜내려 하는 것 또한 사람의 본성인 것 같습니다. ‘인생은 결국 과정의 연속일 뿐 결말이 있는 게 아닙니다’라는 박완서 선생님의 문장을 자주 곱씹으며 되도록 결과에 집중하지 않고 과정을 즐기려고도 애쓰고 있죠. 최근 저는 산책을 하며 관심을 여러 갈래로 확장하는 취미를 가졌습니다. 아름답거나 귀여운 것들에 관심을 던지고 집중하다 보면 일상의 건강이 자연스럽게 회복됩니다. 인생의 거친 면을 만났을 때, 그것에 매몰되지 않고 새로운 판타지에 마음을 몰두시키는 것이 때로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됩니다. 불안하지만 섬세하게 빛나는 삶을 여러 시선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것, 그런 작업을 계속하고 싶습니다.
글 이소진 수석 기자
취재 협조 및 자료 제공 애슝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