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퍼포먼스, 설치, 회화에 이르기까지 매체의 경계를 넘나들며 작업 세계를 구축해 온 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회화 연작을 중점적으로 소개한다. 2012년부터 이어온 연작 <역사 회화>는 작가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으로 표백한 청바지를 활용해 다층의 이미지를 쌓아 올렸다. 태국에서 나고 자란 그에게 청바지는 의미가 남다르다. 서양 중심의 세계화를 상징하는 물건인 동시에 드러나지 않는 지구 반대편의 노동의 역사가 묻혀 있기 때문이다.
청바지와 더불어 작가의 작품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는 불이다. 그는 상징성이 도드라진 청바지와 그 위에 쌓아 올린 이미지를 불로 태우는데, 한 줌의 재로 변해가는 과정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캔버스에 사진을 붙이고, 그 위에 불에 타고 남은 청바지와 이미지를 덧댄 후에 다시금 그 위로 물감을 사용해 그림을 그렸다. 즉, 타고 남은 표백 된 청바지와 불에 타 들어가는 모습이 담긴 사진 그리고 그 위에 물감으로 그린 그림까지 세 가지 층위를 지닌 회화인 셈이다.
한편,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눈길을 끄는 건 마치 불에 타고 남은 듯한 모습의 검은색 흙바닥이다. 작가는 벽을 따라서 기도문을 부조로 새겼는데, 약 10년 전 작가가 즐겨 보던 TV 드라마 〈Heroes〉에서 보고 감명 받은 문장과 문구를 차용했다고 한다. 개인과, 사회, 삶과 죽음, 다양한 신념 체계를 아우르는 존재와 의미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이번 전시에서 재로부터 솟아난 기도문 부조는 자막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
태초에 발견이 있었다 / 잠을 방해하는 새로운 악몽 / 혼란에 질서를 부여할 필요 / 우리는 외면당한 기도를 통해 이 세상을 만들어 나간다. / 격변 너머에 광휘 있고 / 통합에 대한 향수 / 애도의 땅에서 / 공기에, 잡을 수 없는 것에, 당신을 맡긴다 / 유령은 갖지 못한다, 아무것도
”
불과 재, 두 가지 요소를 활용한 회화와 부조 그리고 전시 공간을 통해서 작가는 자신의 사적 경험과 주변의 사회적 사건을 고찰하고 서술한다. 모든 것을 환원 불가능한 상태로 태워버리는 불과 그 결과물인 재를 둘러싼 작품들 속에서 작가는 관객으로 하여금 창조와 파멸의 우주적 순환구조에 대해 조망할 기회를 제공한다. 전시는 오는 1월 29일까지.
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
1986년 태국 방콕에서 태어난 작가 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는 2009년 로드아일랜드 디자인 스쿨에서 미술학사를 취득하고 2012년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미술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방콕과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며 전 세계 곳곳에서 전시 및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또한 작가는 ‘고스트(Ghost)’라는 이름의 방콕 기반 예술 및 퍼포먼스 축제의 공동 설립자로도 활동 중이다. 최근에는 영국 미술 전문지 <아트 리뷰>가 매년 미술계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을 선정하는 <파워 100> 중 88위에 이름을 올렸다.
글 heyPOP 편집부
자료 제공 국제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