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시절부터 나는 애니메이션에 빠져 살았다. 아파트 상가의 비디오·만화책 대여점을 들락거리며 〈블리치〉, 〈학원 앨리스〉를 빌려 봤다. 다음 권을 품에 안고 집으로 달려갈 때의 그 기분이란! 때때로 오타쿠에 대한 따가운 시선도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매일 밤 나는 ‘명작 애니메이션’을 검색했다. 나의 ‘오타쿠’ 생활은 20년 넘게 계속됐고, 결국 성인이 돼 애니메이션 비평 잡지의 발행인이 됐다.
그럼에도 나 자신을 ‘진짜 오타쿠’라 당당히 말할 수 없었다. 서브컬처 행사에 한 번도 가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서브컬처 행사인 ‘코믹월드’는 고사하고, 국내 최대 규모의 서브컬처 행사인 AGF, 2023년 시작된 신세대 서브컬처 행사인 ‘일러스타 페스’ 등 모두 나에겐 먼 일이었다. 코스튬 플레이 한 번 해보지 않은 내가 그런 곳에 가도 될지 겁이 났다.
그렇다. 서브컬처 행사는 이런 묘한 ‘진입장벽’이 존재한다.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지만 동시에 그들만의 세계라는 느낌이 공존한다. 그런데 그 장벽을 허물 만큼 ‘만만한’ 축제를 찾았다. 나처럼 첫 방문을 망설이는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은 곳, 바로 부천국제만화축제(이하 부만축)다.
올해로 29회를 맞은 부만축은 2026년 9월 18일부터 20일까지 ‘만화·웹툰 만만합니다’를 주제로 열렸다. 만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편하게 와서 즐기라는 의미를 담은 타이틀이다. 축제 마지막 날인 20일 직접 방문했다. 실제로 부만축은 코스튬 플레이어와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 방문객이 자연스레 뒤섞여 있는, 서브컬처 축제였다.
일단 박물관에서 만화 교양을 쌓자
부만축은 1998년 처음 열렸다. 초기에는 송내역 인근 복사골문화센터에서 열리던 부만축은 2009년부터 지금의 한국만화박물관과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일대를 주요 무대로 삼아왔다. 한국만화박물관은 2001년 부천종합운동장에서 처음 문을 열었으며, 2009년 지금의 상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입장권은 현장 예매와 사전 예매 모두 가능하다. 현장 예매는 1인 5,000원, 온라인 사전 예매는 3,000원으로 저렴하다. 입장권을 한국만화박물관 입구에서 수령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박물관 내부로 들어가게 된다. 축제를 즐기기 전, 한국 만화의 역사 먼저 제대로 공부하라는 무언의 압박. 왠지 싫지 않다. ‘만만’하지만 ‘제대로’ 즐기라는 것 아닌가.
먼저 박물관 로비에서 진행하고 있는 이벤트로 준비 운동을 시작했다. 한쪽에선 아이들을 위한 ‘키캡 만들기’ 체험이 진행 중이었고, 새마을문고부천시지부에서 주최하는 알뜰도서교환전도 눈에 띄었다. 나도 도서교환을 위해 미리 집에서 가져온 헌책을 제출하고 그림책 하나를 손에 얻었다. 경기국제코스프레페스티벌 10주년 특별 전시도 진행 중이었다. 지난 10년 동안의 행사 사진과 고퀄리티의 코스튬 복장을 구경할 수 있었다.
뒤이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본격적으로 만화박물관 시작이다. 전시실은 3층과 4층에 위치 했다. 3층 상설전시관에서는 한국 만화의 역사를 공부할 수 있었다. 특히 천계영, 허영만 등 유명 한국 작가들이 사용한 펜과 마우스를 전시한 공간이 인상 깊었다. 작품 전시뿐 아니라 1980~1990년대 만화방 풍경을 재현해 놓아서, 여기저기서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엄마 어렸을 때는”이라며 설명해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중앙 통로를 통해 4층으로 올라가자 웹툰의 시대가 열렸다. 조석 작가의 〈마음의 소리〉, 이말년 작가의 〈이말년 씨리즈〉 등 K-웹툰 시장의 문을 연 1세대 작품들부터 광진 작가의 〈이태원 클라쓰〉까지 익숙한 작품들이 눈에 들어오자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한 마디로 ‘뽕이 찬다’는 마음. 축제와 함께 문을 연 기획전 〈무림(武林)〉 도 눈여겨볼 만하다. 2025 부천만화대상 수상작인 류기운·문정후의 〈아수라〉를 중심으로 무협의 세계를 살펴볼 수 있었다.
전시가 끝난 뒤에는 만화 그리기 체험존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었고, 2층의 한국만화도서관에서 무료로 만화를 읽을 수 있었다. 특히 만화도서관은 국내 최대 규모의 만화전문도서관으로, 국내외 만화단행본뿐 아니라 만화 잡지, 이론서 등 다양한 만화 관련 서적을 열람할 수 있다. 축제가 아니더라도 평소에 들러 무료로 만화를 읽기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밖에서는 시끌벅적한 축제가 진행 중인데도 실내는 질서가 유지되고 있었다.
무대 위 OST를 들으며 책장 넘기기
자, 이제 교양을 쌓았으니 본격적으로 즐길 차례다. 박물관 바깥에서는 여러 판매 부스와 레트로 오락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오락실에는 DDR 펌프 게임기, 농구 게임기 등이 준비되어 있었고,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와 똑같이 차려입은 코스플레이어들이 정말 애니메이션 속 한 장면처럼 함께 게임을 하고 있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피규어나 만화·애니메이션 굿즈, 가챠를 판매하는 판매 부스도 있었다. 높게 쌓인 굿즈들을 구경하고 있자니 사고 싶은 물건이 잔뜩이었다. 가격도 온라인 판매가와 비교했을 때 나쁘지 않았다. 결국 나도 평소에 탐내던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시리즈의 ‘마키나미 마리 일러스트리어스’ 캐릭터 피규어를 1만원대 후반의 합리적인 가격으로 하나 구매했다. “국내 최저가”라며 강조하던 사장님의 말씀대로, 중고 거래 플랫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가격이었다.
이 외에도 카페 부스, 캐리커처 부스 등 다양한 판매 부스가 있었다. 부만축 입장권이 있으면 무료로 캐리커처 예약을 할 수 있는 모양이었지만, 내가 갔을 땐 이미 마감이었다. 현업 만화가들에게 캐리커처를 받는 경험을 무료로 체험할 수 있다니. 이것만으로도 입장권 가격보다 값비싼 경험 같았다.
축제는 바로 옆 부천한옥체험마을까지 이어졌다. 한옥마을로 들어서는 입구에 마련된 미니 스테이지 무대에선 만화·웹툰 OST 아마추어 공연이 진행 중이었다. 19일 토요일에는 경연도 진행됐던 모양이다. 무대와 관객석 모두 코스튬 플레이어들로 가득 차 다양한 작품이 하나의 세계관으로 뒤섞여 있는 기분이었다. 즐거웠다.
한옥마을 내부에서는 수많은 코스튬 플레이어들이 서로 모여 놀고 있었다. 놀러 온 아이들과 함께 사진을 찍는 플레이어들도 많았다. 코스튬 플레이어, 가족 방문객, 지역 주민들이 마을 안에 옹기종기 어울리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정말 모두에게 열려 있는 축제임이 느껴졌다. 이용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진 않았지만, 무료 한복 체험도 할 수 있었다. 한옥 안에서 만화를 읽을 수 있는 고즈넉한 한옥 만화카페는 거의 유일하게 사람이 붐비지 않는 곳이었다.
구경을 하다 보니 배가 고팠다. 삼산체육관역 5번 출구 바로 앞에서 열리고 있는 푸드존으로 향했다. 15대의 푸드트럭이 양 옆에 늘어서 있었고, 중앙에는 간이 테이블과 의자가 마련되어 있었다. “닭강정 세 개 남았습니다!”라는 외침에 나도 모르게 결제까지 하고 나니, 앉을 자리가 없었다. 좌석이 부족한 건 아쉬운 점이었다. 스탠딩 테이블에서 어찌저찌 배를 채웠다.
마지막으로 가장 기대됐던 야외 만화카페로 향했다. 잔디밭에 누워 가을 바람을 맞으며 하루 종일 만화를 볼 수 있는 공간이라니. 이 역시 자리가 여유롭진 않았지만, 빈자리를 찾아 간신히 앉을 수 있었다. 잔디밭 무대에선 버스킹 공연이 진행 중이었다. 부천 관내 대학 버스킹 동아리의 무대였다. 〈원피스〉 주제곡 등 익숙한 플레이리스트로 관객들 모두 남녀노소 하나가 됐다. 감미로운 노랫소리를 들으며 빈백에 누워 다카하시 루미코 작가의 〈시끌별 녀석들〉을 읽고 있으니 “10분 뒤 행사가 종료된다”는 외침이 들려 왔다. 이런! 정말 문 닫을 때까지 있었잖아?
이 외에도 축제 기간 동안 제10회 경기국제코스프레페스티벌, 국제만화가대회 창립 30주년 프로그램을 비롯해 한·불 수교 140주년 기념 작가 대담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올해 축제 방문객은 약 10만 명이었다고 한다.
코스프레와 만화를 잘 모르는 사람도 방문해도 괜찮냐고 물어본다면, 오히려 좋다고 답하고 싶다. 특히 좋았던 것은 각자의 속도로 머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지식을 채우고 싶다면 박물관에, 수집을 좋아한다면 판매 부스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구경하다 지치면 책을 펼쳐 쉬고, 읽다가 다시 축제를 둘러보러 나서면 됐다. 사람은 많았지만 여유가 있었다.
축제는 막을 내렸지만 내년 부만축이 다시 열리기 전에도 한국만화박물관은 언제든 찾아갈 수 있다. 기획전 〈무림〉도 2027년 8월 29일까지 이어진다. 이 세계에 진입하고 싶은 자, 부천으로 오라.
글 김은빈 객원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