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기 전 가장 먼저 만나는 건 제목과 포스터다. 짧게는 한 단어, 길게는 한 문장에 가까운 제목은 영화의 분위기와 장르, 시대상을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한국영화 100여 년의 역사를 ‘제목’으로 들여다보는 기획전 〈제목전(展) – 텍스트, 타이포그래피, 무빙 이미지〉가 열리고 있다. 1919년 개봉한 한국 최초 영화 〈의리적 구토〉부터 2025년 개봉작까지, 총 8,436편의 한국영화 제목을 수집하고 분석했다.
흥미로운 건 제목이 단순한 이름을 넘어 시대의 정서와 사회적 시선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전시가 분석한 한국영화 제목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단어는 ‘사랑’이다. 총 197편의 제목에 쓰였고, 이어 ‘여자’, ‘밤’, ‘청춘’, ‘왕’, ‘남자’, ‘사나이’ 등이 뒤를 이었다. 반복되는 단어를 따라가다 보면 한국영화가 어떤 감정과 관계, 인물 중심의 서사를 표현해 왔는지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다.
전시에서는 제목 속에 담긴 문화사회적 맥락도 조명한다. 대표 섹션 ‘너의 이름은 여자’는 영화 제목 속 여성과 남성의 호명 방식을 비교한다. 여성을 지칭하는 어휘는 남성을 지칭하는 어휘보다 더 다양하게 나타났는데, 이는 신파와 멜로드라마, 1970~80년대 영화의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제목은 한국영화가 여성을 어떤 감정과 서사의 틀 안에서 재현해 왔는지 보여주는 단서가 된다.
시대별 제목의 말맛을 살펴보는 재미도 있다. 1970~80년대에 자주 등장한 ‘돌아온’ 시리즈나, 액션 활극에서 발견되는 “친구여 조용히 가다오” 같은 제목은 당시의 장르적 감각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지금의 제목과 비교하면 다소 과장되고 낯설게 느껴지지만, 바로 그 말투 안에 한 시대의 대중문화가 남아 있다.
텍스트가 이미지로 구현된 작업을 보는 것도 또 다른 관람 포인트다. 이상화 감독은 2000년대 한국영화 제목과 캐릭터를 모티프로 애니메이션을 선보인다. 여기에 스튜디오 빛나는, 꽃피는 봄이 오면, 프로파간다 등 한국영화 포스터 디자인을 이끌어온 스튜디오의 작업도 함께 소개된다.
Interview with 정민화 큐레이터
ㅡ 영화 ‘제목’을 전시의 주제로 삼은 이유가 궁금합니다.
영화 제목은 관객이 가장 먼저 마주하는 요소 중 하나예요. 그런데 그동안 제목 자체만을 조명한 전시는 많지 않았던 것 같아요. 제목은 영화의 내용을 담고 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시대의 사회문화적 흐름을 많이 반영한다고 생각했어요. 제목에 초점을 맞춰보면 한국영화를 새롭게 읽을 수 있겠다고 봤습니다. 또 제목은 단순히 쓰이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래픽적으로도 시대마다 변화해 왔거든요. 디자인적인 측면에서도 흥미로운 전시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ㅡ 준비 과정에서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나요?
대상으로 삼은 영화가 1919년부터 2025년까지다 보니 데이터가 정말 많았어요. 그중에서 유의미한 제목을 정리하고, 단어 빈도를 분석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죠. 처음에는 AI를 활용하면 조금 수월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사람이 직접 판단해야 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눈’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그게 신체의 눈인지, 내리는 눈인지 구분해야 하잖아요. ‘사랑’도 첫사랑처럼 붙어 있는 단어까지 살펴봐야 했고요. 결국 제목을 하나하나 보면서 직접 카운팅 했습니다. 데이터를 뽑는 데만 한 달 정도 걸렸어요.
ㅡ 분석하면서 의외로 흥미로웠던 결과가 있었나요?
가장 많이 등장한 단어가 ‘사랑’일 거라는 건 어느 정도 예상했어요. 그런데 100위까지 뽑아보니 중간 순위부터는 보통 25편에서 30편 정도에 등장한 단어가 많더라고요. 특정 단어에 쏠림이 심하지 않았다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영화 제목을 짓는 과정에서 생각보다 다양한 단어가 쓰이고, 많은 고민이 들어간다는 걸 느꼈어요. 또 ‘돌아온’이라는 단어가 1970~80년대에 집중적으로 등장하는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왜 이 시기에 돌아온다는 표현이 많이 쓰였을까”를 생각하며 보면 또 다른 관람 포인트가 될 거예요.
ㅡ 관람객이 놓치지 않았으면 하는 섹션이 있다면요?
신덕호 그래픽 디자이너가 작업한 ‘제목의 시’를 추천하고 싶어요. 예를 들어 ‘여자’라는 단어가 들어간 영화 제목을 모아서 하나의 시처럼 읽히도록 배열을 했어요. 제목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해석한 콘텐츠라 재미있게 보실 수 있을 것 같아요. 또 이상화 감독이 2000년대 이후 한국영화 제목을 애니메이션으로 재해석한 작업도 이번 전시에서만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글 김지오 기자
자료제공 및 취재협조 한국영상자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