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20

90년 대생이 수집하는 서울의 현대

'서울의 현대를 찾아서'
누가누가 더 높이 올라가나 경주라도 하듯 서울엔 계속해서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고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올라간다. 이 사회를 완전하게 만드는 건 특별한 사람도, 유명한 사람도 아닌 평범한 일상을 살아내는 우리들이다. 이와 같이 서울을 구성하는 무수한 빌딩과 아파트, 백화점, 복합문화시설 그중 어떤 것도 유일무이하지 않다. 유일하게 유일한 것은 이 땅 위에서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옛 건물들이며 이들이 있기에 도시는 완전해진다. 최근 몇 년 사이 서울의 옛 장면을 수집하는 이들이 부쩍 늘어나는 걸 보며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사라진 뒤에 기록은 불가능하지만, 기록이 가능할 때 행하는 건 그 가치를 아는 사람들만이 하는 일이기에. 각자의 삶이 있는 이들이 왜 시간과 힘을 들여 서울의 옛 모습을 기록하게 됐는지, 어떤 걸 기록하는지 물어보기로 했다.

SNS에서 ‘#서울의현대를찾아서’ 해시태그와 계정을 통해, 사라져 가는 ‘서울의 현대’를 포착하고 기록을 공유하는 대학원생 김영준. 유년 시절 가족들과 함께 차를 타고 내달리던 고가도로 위에서 차창 너머 바라본 풍경은 웅장한 서울의 스카이라인이었다. 위로 치솟는 빌딩들 사이 낮은 건물이 공존하고, 오래 살던 아파트가 재개발되면서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이 모든 광경을 목격한 90년 대생 김영준은 이 도시를 조금 더 깊이 이해하고 기록하기 위해 도시공학과로 진학했다. 2011년부터 길을 걷다 마주하는 오래된 빌딩과 아파트, 다리 그리고 맨홀, 휘장 등 오랜 시간 수집해온 장면을 ‘서울의 현대를 찾아서’라는 이름 아래 소개하기 시작한 그. 현재 거주하고 있는 도쿄의 도시 기록까지 확장해 활발한 도시 수집 활동을 공유하는 김영준을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Interview with 김영준

서울 원효 아파트 앞에서 김영준의 모습 ⓒ김영준 ​

저도 오래된 건물을 좋아해 한때 낡은 빌딩의 간판만을 촬영해 모아볼까 생각하기도 했어요. 오래된 건물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해도 멜랑꼴리한 기분이 들면서 마음이 일렁이거든요. 저는 비록 실행에 옮기지 못했지만 2019년 ‘서울의현대를찾아서’라는 계정을 처음 발견했을 때 ‘역시 누군가는 움직이고 있었어!’했던 기억이 나요. ‘서울의 현대를 찾아서’라는 해시태그 아래 서울의 장면을 수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2010년 대학생이 되던 해 학교를 오가며 DSLR 카메라나 스마트폰으로 길 위의 장면을 매일 같이 담기 시작했어요. 본격적인 시작은 2011년 서울의 오래된 오피스 빌딩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부터였고, 이후 4년간 오래된 건물을 사진으로 기록으로 남겨왔어요. 그러다 문득 이런 기록을 혼자만 갖고 있는 것이 못내 아쉽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가능한 많은 이들과 공유하자는 마음으로 마침내 #서울의현대를찾아서 라는 해시태그 네이밍을 만들었고 트위터에 기록을 업로드하기 시작했죠. 저의 첫 업로드는 한강로변의 2층 상가 건물이었을 거예요.

강남 고속버스터미널 진출입로 아치의 역사. ⓒ김영준
강남 고속버스터미널 진출입로 아치의 역사. ⓒ김영준

‘서울의현대를찾아서’ 해시태그 기록은 어떠한 기준 아래 기록하고 수집해 소개하고 있나요?

어떻다 할 명확한 기준이 있다기 보다 길을 걷다 제 시선을 불현듯 잡아당기는 곳들을 주로 올리고 있어요. 혹은 예전에 찍어둔 사진 기록을 들여다보다가 눈에 밟히는 공간을 올리기도 하고요. 대중적으로 이름난 공간이나 유명한 사람이 설계한 건축물도 물론 올리고 있습니다만, 가능한 한 문화재가 아니거나 그동안 크게 조명을 받지 못한 공간을 더 많이 소개하고자 하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갖고 있어요.

ⓒ포엣츠 앤 펑크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영준 님의 유년 시절 풍경이 궁금합니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서울의 장면이 있을까요?

제가 태어났을 때부터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거주하던 주공 아파트가 재건축에 들어가 철거되고 또 그 자리에 새로운 아파트가 지어지는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어요. 조금 거창하게 표현하자면 도시의 구획 하나가 완전히 소멸되고, 재창조되는 생애 주기를 어린 나이에 목도했다고 할 수 있죠. 이외에도 유치원을 다닐 무렵(1995-1997년) 해마다 명절이 되면 부모님은 저를 태우고 텅 빈 서울 시내 드라이빙을 나가곤 했는데 이때 청계고가도로 위에서 바라본 서울의 스카이라인이 제가 지금까지 이 도시의 모습을 사랑하게 된 원체험原體驗으로 작용하지 않았나 싶어요. 지금은 서울 도심 한가운데에 청계천이 흐르지만 그때만 해도 청계천에는 콘크리트 덮개가 덮여 있었어요. 그 위로 나 있던 청계고가도로는 이미 낡을 대로 낡아버린 고가도로였지만, 양쪽에 우뚝 솟은 빌딩 사이를 자동차로 쌩쌩 달리는 경험은 비일상의 결정체였죠.

서울에서 도시공학과를 졸업하고 도쿄로 넘어가 대학원 과정을 지내고 있습니다. 도시가 가지고 있는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고민하는 학문에 관심이 생긴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중학교 3학년 무렵, 어머니의 추천으로 『서울도시계획이야기』(손정목 著, 도서출판 한울)를 읽게 된 것이 결정적인 계기였어요. 어릴 적부터 자동차나 비행기, 전철 같은 탈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고가도로에서 목도한 도시의 스펙타클, 재건축에 들어가는 아파트와 맞물려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총망라하는 분야라고 생각했었죠.

소공동 신세계백화점 본점 정문, 1930년 준공, 2006년 리모델링. 1930년 미쓰코시三越 경성지점으로 지어진 이후 미군PX를 거쳐 삼성그룹에 편입, 신세계백화점 본점으로 거듭났다. 90년 동안 운영 주체가 여러 차례 바뀌는 동안에도 일관되게 '상업 건축' 으로서의 정체성이 유지되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김영준

그렇게 도시공학과로 진학해 좋아하는 주제를 깊이 들여다보는 시간은 어땠나요?

역시 ‘이론과 실제는 다르구나’라는 걸 엄청 느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동시에 내가 ‘흥미’와 ‘전문성’을 가지고 업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이 분야라는 것을 확신했고요. 학과 공부 외에도 뜻이 맞는 동기들과 다양한 도시 탐구 활동을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이런 활동이 도시공학과에 진학하고 가장 의미 있었던 활동이 아니었나 싶어요. 학부-석사-박사과정 모두 세부적인 연구 분야는 다를지라도 ‘도시공학’이라는 학과명 아래에서 햇수로 10년 동안 공부하고 있습니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통해 처음 건물의 기록을 시작했고 지금은 주로 인스타그램이라는 SNS를 통해 건물의 역사와 쓰임새, 만든 이 그리고 건물의 변천사까지 깊이 있는 기록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 많은 정보들은 어떤 과정을 거쳐 수집하고 있나요?

건물의 경우 가장 먼저 ‘온라인 건축물대장’ 시스템에 검색해 해당 건물의 준공 연월일, 용도, 규모, 구조를 조회하고 가능하면 설계자의 정보까지 서치해 최대한 ‘신상’을 파악하려고 노력합니다. 온라인 건축물대장은 사람으로 치면 호적등본의 개념이에요. 또는 국토교통부의 ‘건축물 생애 이력 관리 시스템’에서 해당 건물의 주소를 입력해 간편하게 정보를 조회할 때도 있고요. 하지만 건물들 중에서도 건축물대장에 기입된 정보가 불충분하거나, 기념비 혹은 맨홀과 같이 공식 문서가 없는 것들은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국가기록원 사이트 등을 통해 정보를 디깅하고 있어요. 마치 탐정 활동을 하는 기분으로 최대한 해당 공간의 신상에 접근을 하고 있죠.

김영준의 독립출판물 과 , . ⓒ김영준
최근 출간한 김영준의 내지 ⓒ포엣츠 앤 펑크스

최근 포엣츠 앤 펑크스와 함께 출간한 <도시, 서울>이 영준 님의 첫 책은 아니죠. <서울의 정말 오래된 빌딩들> <서울의 사라진 건축들> <아현고가도로의 마지막 날>이라는 이름으로 그동안의 기록을 한데 묶어 책으로 출간한 바 있습니다.

<서울의 정말 오래된 빌딩들>과 <아현고가도로의 마지막 날>, <서울의 사라진 건축들>은 ‘이런 주제를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는 기대 반 걱정 반으로 만든 책이었어요. 출판의 형태도 완전한 독립출판이었고요. 2019년에 이 세 권의 독립출판물을 들고 언리미티드에디션에 참가했었는데 세 권 모두 세 자릿수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하면서 ‘이런 활동을 나만 하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기쁨과 자신감을 얻었어요. 그리고 2019년 말~2020년 초 사이 고등학교 동창을 통해 ‘포엣츠 앤 펑크스POETS&PUNKS바자 출신의 오선희 디렉터가 런던을 기반으로 운영하는 출판사‘를 소개받게 되었어요. 제가 그동안 인스타그램에 소개한 서울의 장면을 한데 묶어 출판해 보자는 제안을 주셨어요. 그렇게 출간한 <도시, 서울>은 서울에서 나고 자라 도시공학을 전공한 1990년 대생의 시각에서 ‘수집’ 혹은 ‘큐레이션’한 서울의 장면을 한데 모은 책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어요. 제가 인스타그램을 처음 시작한 2015년에는 지금처럼 이렇게 거대한 기획이 될 줄은 몰랐어요. 지금에 와 돌이켜보니 처음부터 무언가를 ‘달성’하겠다는 목표 없이 매달, 매주 그저 눈길과 발길이 닿는 대로 기록을 해 왔기에 오히려 서적화가 가능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영준 님이 서울의 현대 건물을 관찰할 때 가장 매력을 느끼는 부분은 어떠한 지점인가요?

서울의 거리를 걷는 것만으로도 195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급격한 시간의 변화를 느낄 수 있어요. 100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식민지의 중추도시·전쟁·개발독재와 고도성장·올림픽&월드컵·민주화라는 현대사가 그대로 녹아든 공간이 바로 도시 ‘서울’이니까요. 외관만 놓고 본다면 미국과 유럽, 일본의 도시들에도 20세기 초중반에 지어진 멋들어진 건물들이 많습니다만, 그 이면에 담긴 복잡다난한 과거의 실타래는 서울 그리고 더 나아가 한국의 도시들을 따라올 곳이 드물다고 생각해요.

‘1900년대에 태어났다면 어땠을까-‘하는 상상을 자주 하곤 해요. 역사가 오래된 건물들만 보아도 요즘 새로이 지어진 것보다 멋진 유산이 많잖아요. 만약 영준 님이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서울의 현대’에 태어나 살아볼 수 있다면 어떤 걸 가장 해보고 싶나요?

만약 제가 태어난 1991년 이전의 서울을 거닐 수 있다면 꼭 반드시 컬러 사진으로 서울의 길거리를 아낌없이 담고 싶어요. 물론 1940년대 이후 주한미군 혹은 관광객들에 의해 격동의 시기였던 서울의 모습이 일부 컬러로 담기긴 했지만 아무래도 타자의 시선에서 ‘매번 찍히는 공간’ 만이 담기는 경향이 강했어요. 서울의 인구는 1930년대 중반에 50만 명을 돌파하고 1942년에는 100만 명에 도달했지만 일제강점기 식민 지배와 6.25 전쟁을 겪으면서 그저 ‘지도의 번지수’로 만 겨우 파악이 되고 당신의 모습이 구체적인 시각 자료로 남지 못한 공간이 너무나 많거든요. 제1세계 선진국 대도시 중에 이런 곳이 서울 말고 또 있을까요? 기록의 미비가 요즘의 서울을 둘러싼 아픈 논쟁들의 근원이라는 생각도 종종 듭니다.

(왼쪽) 양지 빌딩, 1989년 준공. 물만두로 유명한 중화요릿집 취영루 본점이 1층과 2층에 입점해 있다. 빌딩 전체가 모난 부분 없이 모서리가 둥글게 둥글게 처리되었으며, 외벽의 푸른 타일은 동유럽의 20세기 건축을 연상케 한다. (오른쪽) 약수아파트, 1968년 준공. 14-17평형대의 44세대로 구성된 상가아파트로 원조 주상복합 아파트. 준공 당시의 외장으로 추정되는 벽돌 외벽과 층과 층 사이를 구분하는 흰색 띠가 조화를 이루면서 제법 중후한 인상을 준다. ⓒ김영준 ​

‘도시의 경관을 완성하는 건 유명 건축가가 설계한 빌딩들보다도 무명의 빌딩들’이라는 말에 공감했습니다. 낡고 오래된 타일로 뒤덮인 상가 건물 혹은 몇십 년 넘은 식당이 오랜 시간 자리를 지킨 빛바랜 건물 같은 것들이 우리의 일상에 더 가깝잖아요. 이런 무명의 건물을 보존하는 일은 왜 중요하다 생각하나요?

마치 공기를 구성하는 질소와 같은 존재라고 할까요? 없어선 안 될 존재이지만 너무나 흔하다 보니 미처 존재조차 깨닫지 못하는 가장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무명의 건물들’이라 생각합니다. 요즘 SNS나 블로그를 가만 보다 보면 문화재로 지정된 근대건축물과 문화주택, 양옥집을 탐방하며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분들이 많이 늘어났더라고요. 그러나 아파트 재건축 시 ‘한 동 남기기*‘ 정책이나 1950~1970년대 지어진 문화공간의 철거에는 정작 시큰둥한 분들이 많아 아쉬운 마음이에요.

*한 동 남기기 정책 : 10여 년에 걸쳐 추진되어왔던 서울시의 ‘한 동 남기기’ 사업. 해당 사업은 2012년부터 박원순 시장이 추진했던 사업으로 ‘흔적 남기기’ 사업의 일환이었다. 개발 초기 아파트의 생활 양식을 보존해야 한다는 취지로 서울 노후 재건축 단지 4곳의 1~2개 동을 보존하게 했으나 시장이 교체되며 해당 사업은 모두 철회되었다.
중구 신당동 일제강점기 경성부 휘장 맨홀. 일제강점기 당시의 일본인 자본가에 의해 택지가 조성되던 때에 함께 부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김영준
서울용산우체국 앞. 나란히 놓인 서울 수도 맨홀과 최소 칠십 년은 되었을 경성부 양수기 맨홀 뚜껑. 위치 상으로 볼 때 일본인들의 밀집 거주지였던 이곳에 1930년대에 이미 상수관망이 부설되어 현재까지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김영준
한국전력의 전신, 경성京城전기 주식회사 맨홀. 1930년대에 부설된 것으로 추정되며 마모가 심하지만 그래도 경성전기의 휘장은 상태가 양호하여 식별 가능하다. 이곳 이외에도 서울 곳곳에 경성전기의 맨홀이 아직 꽤 남아 있다. ⓒ김영준

친구로부터 “너는 땅만 보고 다니니?”라는 핀잔을 들었다는 일화를 보면 얼마나 맨홀 수집에 불을 켜고 다니는지 알 수 있겠더군요. 2021년 5월 《#서울맨홀 : 발밑에 숨은 100년의 역사》라는 전시를 열기도 했고 현재 일제강점기 당시 만들어진 맨홀 뚜껑을 발굴해 ‘경성부 맨홀 지도’를 만들고 있다고요. 영준 님의 시선에서 서울 맨홀 역사는 어떤 양상을 띄고 있나요?

다른 선진 대도시들과 비교했을 때 근현대의 서울은 반세기 사이 더욱더 극적인 행정구역의 확장을 겪어왔어요. 상하수도 및 가스·전기의 부설에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맨홀 또한 행정구역의 확장에 따라서 점점 더 그 영역을 넓혀왔고요. 나아가 1910년부터 1945년까지는 맨홀의 부설 주체가 식민 통치 기구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단순 도시 인프라라는 점을 넘어 복잡한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다는 것이 서울 근현대 맨홀의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동묘앞역 부근에서 일제강점기 시절의 경수 양수기京水量水器 덮개. 신설동 및 황학시장 일대에서도 똑같은 경수 양수기 덮개가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비슷한 시기에 상수도가 보급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영준 ​

2020년 새해 첫날 아침 동묘앞역을 걷다가 우연히 경성 수도 양수기를 발견한 것처럼 길을 걷다가 우연히 장면을 포착하고 기록하는 일이 이제는 영준 님에게 일상이자 취미로 자리 잡았어요. 이렇게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혹은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희귀한 장면을 포착했을 때 어떤 기분일지 궁금해요.

저도 모르게 작은 환호성을 지를 때가 있어요. 물론 제가 그 장면의 역사상 최초 발견자는 아닐 테지만, ‘2020년대에’ 그것도 해당 맨홀이나 건물을 제대로 기록해서 SNS에 공유한 사람은 아주 높은 확률로 제가 처음일 테니까요. 만약 저 또한 발견하지 못해 영원히 조명을 받지 못하고 고철 혹은 폐기물로 취급되어 먼지 속으로 사라졌을 거라 생각하면 몇 배의 기쁨과 강한 애착이 생겨요.

(왼쪽) 가스 시공 지정 업체 서울시 1기 휘장. (오른쪽) '서울의현대를찾아서' 수집을 기록하는 계정의 대표 로고. 서울의 제1기 휘장 문양에서 영감을 받았다. ⓒ김영준

‘서울의현대를찾아서’ 로고 디자인은 서울시 제1기 휘장을 오마주 했던데요.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맨 처음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었을 때는 로고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없었는데 계정이 점차 커지고 제 계정에 들어와 기록을 읽고 가는 분들이 늘어나더라고요. 대외적으로 보여질 때에 내가 기록하는 이 활동의 방향이 잘 보이게끔 정리하는 것이 좋겠다 생각이 들었고, 어떻게 하면 계정의 운영 목적을 반영할 수 있을까 하다가 서울시 제1기 휘장만 한 것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2019년 언리미트에디션에 참가한 김영준의 모습 (왼쪽 인물) ⓒ김영준 ​

국내에서 도시공학과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떠나 도시계획에 관한 학업을 이어가는 이유는 어떠한 새로움을 찾기 위해서였나요?

가장 큰 이유는 도쿄에서 살아보고 싶었어요. 도쿄를 종횡무진하는 고가도로와 철도들 그리고 오래된 빌딩을 일상의 공간으로 삼는 건 어떤 삶일까 하는 생각이 대학 내내 있었거든요. 서울과 비슷하면서도 많이 다른 풍경을 일상에 들이고 싶었달까요. 그 외에 학문적인 측면에서는 ‘서울의 현대’를 더 심도 있게 이해하고 연구하고 싶었기 때문에 겸사 겸사 도쿄 대학의 대학원에 진학했고요.

현재 ‘#도쿄의현대를찾아서’ 기록도 연재 중이죠. 서울과 도쿄 두 도시의 풍경은 크게 어떤 점들이 다르고 또 어떤 점들이 닮아있던가요?

서울이 사대문 안이라는 단일 도심 체제를 수백 년간 유지하다 196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강남이라는 부도심(사실상 제2도심)이 개발된 것과 다르게, 도쿄는 이미 1930년대 초반에 현재의 행정구역까지 확장을 완료하면서 전 지역에 대한 시가지 화가 이뤄진 지도 상당히 오랜 세월이 흘렀어요. 2010년대 이후 열심히 부도심의 재개발이 이뤄지고 있지만 대다수의 주거지역은 1900-1930년대의 토지구획정리와 민간 택지 개발 이후로 큰 변화가 없기에 도시 전반적으로 ‘갓 개발된 분위기’가 적다는 것이 특징이에요. 또 도쿄의 특이한 점으로는 개발의 주체 면에서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민간 철도 회사에 의한’ 시가지 개발이 100년 전부터 계속해서 이뤄지고 있다는 점을 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덕분에 철도 노선별마다 각기 다른 특색이 있어 분위기, 취향, 심지어는 마을의 경관까지도 도쿄 안에서 확연히 달라지고 이를 소개하는 문헌도 있을 정도죠.

2019년 6월, 숭례문과 롯데손해보험빌딩의 기묘한 동거. ⓒ김영준
2020년 8월, 고만고만한 규모의 근린 상업 빌딩들 너머로 우뚝 솟은 강남파이낸스센터 빌딩 ⓒ김영준
서초구 서초동 삼풍백화점 로고가 새겨진 쓰레기통. 해당 쓰레기통은 2018-19년 사이에 모두 철거되었다. 삼풍백화점의 참사의 기억은 이렇게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김영준

서울의 현대를 찾아서 산책하기 좋은 서울 동네를 추천해 주신다면요?

저는 개인적으로 을지로와 역삼동 일대를 좋아해요. 을지로의 경우 조선시대부터 현대까지 이어져 내려온 복잡다난한 역사와 그것이 오롯이 반영된 건물들을 가볍게 걸으며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좋아하는데, 반면에 역삼동 일대는 1960년대 후반 토지구획정리 사업 지구로 지정된 이후 1970~1990년대 사이 집중적으로 지어진 단독주택 및 오피스 빌딩들이 모여있기에 ‘오래된 미래’의 느낌을 받을 수 있어요. 이제는 강남을 ‘신시가지’라 부르는 이는 거의 없지만 올림픽 전후로도 여전히 군데군데 지금의 2기, 3기 신도시 마냥 빈 땅이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서울의 변화 속도가 얼마나 빨랐는지 짐작을 해 볼 수 있죠. 역삼동의 건물들은 바로 이런 ‘신시가지’의 기대를 품고 태어난 결과물이기도 하고요.

밀레니엄 힐튼 서울, 1983년 준공, 2022년 폐업, 2023년 철거. 2019년 6월에 촬영한 밀레니엄 힐튼 호텔. 이제는 모두의 기억 속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김영준

2022년 12월 31일 영업을 종료한 ‘밀레니엄 힐튼 서울’ 회고 글을 인상 깊게 보았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좋은 건축물들이 보존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기록을 남기는 일이 최선이라는 의미로 다가오던데요. 지금 영준 님의 기록은 바로 그런 마음이 근간이 되는 걸까요?

저는 현재 도쿄에 체류하고 있기 때문에 서울에서 사라지는 건물들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거나 혹은 보존을 위한 운동에 적극적으로 물리적으로 참여하기 어려운 상황이에요. 그렇기에 더더욱 ‘내가 이런 기록을 남기고 공유라도 하지 않는다면’ 도시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곤 했어요. 제가 처음 본격적으로 기록을 시작한 2010년쯤부터 오늘날까지 오래된 건축물들이 상상 이상의 숫자로 서울에서 사라져 갔습니다. 제가 아무 생각 없이 찍어 두었던 건물 사진이 해당 건물의 마지막 모습인 경우도 왕왕 존재합니다. 그래서 물리적으로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더라도 관심 가는 건물이 생기면 ‘혹시 예전에 촬영한 풍경 속에 저 건물 혹은 장면이 담겨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마음으로 과거의 사진들을 틈날 때마다 뒤져보곤 해요. 결국 사람도 그렇듯이, 도시의 공간 또한 기억해 주는 이가 없으면 사회적으로 영원히 생을 마감하게 되는 것이니까요.

새로운 지대 창출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철거와 삭제 행위도 용납되는 서울에서,

2010년대에 들어서 밀레니엄 힐튼 호텔만큼 많은 이들의 ‘아쉬움’을 독점한 경우도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아쉬움’이 ‘보존’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습니다. ‘아쉬움’과 ‘보존’ 사이에는 엄청난 벽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아쉬움’을 ‘보존’으로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해당 건물이 철거 위험에 처하기 한참 전에,

다시 말해 사람들이 ‘아쉬움’이라는 감정을 품기에 앞서서

그 공간이 어째서 소중한지에 대해 설파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자

가장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보존’이라는 가치를 명시적으로 내걸기에 앞서서 차츰차츰, 비의도적으로 ‘소중함’이라는 감정을 스며들게 하는 것이죠.

애석하게도 현대 서울을 살아가는 이들 중에서는 ‘보존’이라는 말만 나오면 거부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으니까 말입니다.

 

-김영준의 2023년 1월 2일 기록-

김영준이 유년 시절을 보냈던 반포주공 3단지 아파트. 2006년에 철거된 후 현재는 반포 자이 아파트로 재건축되었다. ⓒ김영준

인터뷰를 요청드렸을 때 ‘서울의 현대를 찾아서’ 기록을 더 널리 알리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잖아요. 도시 기록 활동을 하는 데에는 분명하든 분명하지 않든 어떠한 목표가 있을 것 같아요. 지금의 기록들은 어느 곳을 향하고 있나요?

도시의 기억을 가벼이 여기는 야만적인 행위들에 대한 제 나름대로의 ‘항의 행동’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비록 서울의 현재를 실시간으로 따라가기는 어렵지만 서울에서 벌어지는 야만적인 일들이 도쿄에서도 동시에 진행 중이거든요. 도시재생특별 조치법이라는 법령 하에 도쿄의 시가지를 지탱해 왔던 ‘생활의 조직’들이 거대한 하나의 필지로 통합되어 구획의 역사가 지워지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어요. 세운 상가를 어떻게든 철거하려 들거나, 지어진 지 10년도 채 되지 않은 노들섬의 반영구적인 공공시설을 전임 시장의 치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철거하려는 행위가 일어나는 서울에 비하면 애교인 것 같지만 말이죠.(웃음) 참 씁쓸하죠. 아직은 공부하는 학생의 신분이지만, 이렇게 제가 쌓아온 기록들이 결국에는 더 나은 도시를 만들어 나가기 위한 밑거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분명 처음에는 이를 염두에 두고 시작했던 활동이 아니었지만 결국 기록이라는 행위 자체가 기록 그 이상의 의미를 만들어 낸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결국 이런 지점에 도달하게 될 운명이었다고 할까요.

하지영 기자

자료 제공 김영준

하지영
에디터가 정의한 아름다운 순간과 장면을 포착하고, 그 이면에 숨겨진 이야기를 수면 위로 끌어올려 세상에 선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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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 대생이 수집하는 서울의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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