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29

조금 수상한 여행사

로르 프루보 개인전, 심층 여행사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작은 문을 지나치면 관객은 낯선 여행사 사무실에 들어서게 된다. 방금 전까지 직원이 일하고 있었던 것처럼 생생한 공간을 둘러보다 보면 살짝 이질감이 든다. 분명 현실과 똑같은데 뭔가 다르다.
Photo Sangtae Kim © Laure Prouvost; Fondation d’entreprise Hermès

 

동시대 미술 씬에서 흥미로운 작가를 소개하는 아뜰리에 에르메스가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작가 로르 프루보(Laure Prouvost)의 개인전 <심층 여행사>를 3월 25일부터 6월 5일까지 개최한다.

 

프랑스 출신인 로르 프루보는 영국으로 건너와 예술을 전공하고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비디오, 설치, 퍼포먼스, 조각, 회화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로르 프루보는 <윈티(Wantee)>라는 작품으로 50세 미만의 영국 예술가에게 수여하는 ‘터너상’을 수상한다. 영국 출신이 아닌 작가로서는 첫 수상이었다.

 

Photo Sangtae Kim © Laure Prouvost; Fondation d’entreprise Hermès

 

로르 프루보는 실제와 허구를 결합한다. 그의 작품에서 꾸준히 등장하는 개념미술가였던 할아버지는 사실 가상의 인물이다. 작가는 할아버지라는 인물을 기점으로 다양한 허구의 사실을 꾸며내고 작품으로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할아버지의 작업실을 만들어서 영상으로 기록하고, 추모관 건립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등 작가의 배경을 모르는 관객이라면 깜박 속을 정도로 치밀하게 스토리를 설계하고 작품을 만든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선보이는 <심층 여행사>도 마찬가지다. 작가는 관객들을 오래된 ‘아저씨의 여행사 가맹점’으로 초대한다. 현실로부터 벗어나는 여행은 로르 프루보 작품세계의 구심점이라 할 수 있는데, <심층 여행사>를 통해 작가는 여행이라는 소재를 직접적으로 활용한다.

 

Photo Sangtae Kim © Laure Prouvost; Fondation d’entreprise Hermès

 

실제로 존재하지만 ‘진짜’ 여행사는 아닌 곳에서 관객은 묘한 경험을 겪는다. 관객이 뭔가 이상함을 깨닫는 순간은 여행사 내부를 하나씩 깊게 들여 볼 때다. 관객은 어느 순간 벽에 걸린 지도와 여행 광고 포스터, 여행사 직원의 컴퓨터 모니터, 정수기 등이 이상하다는 걸 깨닫는다. 지도는 거꾸로 달려있고, 광고 포스터에는 말이 안 되는 문구가 써져 있으며, 정수기에는 더러운 물이 채워져 있다. 어디 그뿐일까, 여행사라는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오브제들은 왜 이곳에 놓여 있는지 호기심을 자극한다.

 

Photo Sangtae Kim © Laure Prouvost; Fondation d’entreprise Hermès

 

이렇게 작가는 현실과 허구를 뒤얽힌 세계를 만들어내지만, 낯설게 만드는 요소를 끊임없지 제시하면서 사실이 아님을 인지시킨다. 대표적인 장치로 이미지와 사운드, 텍스트와 보이스오버의 어긋남을 들 수 있다. 영상에서 나오는 대사를 자세히 들어보면 예상치 못한 단어들이 조합되어 있어 무슨 뜻인지 단번에 인지하지 못한다. 때로는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빠르게 지나갈 때도 있다. 작가는 서사의 구성요소들을 어긋나게 함으로써 이미지와 언어, 기억과 서사 사이에 오해와 혼돈을 야기하고 현실을 꿈과 무의식의 영역으로 확장해 나간다.

 

Photo Sangtae Kim © Laure Prouvost; Fondation d’entreprise Hermès

 

결국 로르 프루보는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무너뜨림으로써 언어와 관습이 지배해 온 이성 중심의 세계가 작동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전달한다. 그래서 관객은 작가가 빈틈없이 구축한 상상의 세계를 마음껏 즐기다가 갑자기 발견한 작은 틈새에서 그 사실을 깨닫고, 지금까지 감상했던 허구의 세계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된다.

허영은 기자

자료 제공 에르메스 재단

장소
아뜰리에 에르메스
주소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45길 7
일자
2022.03.25 - 2022.06.05
링크
홈페이지
허영은
다양성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든다고 믿는다. 그래서 숨겨진 이야기들을 찾아내서 보고, 듣고, 읽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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