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8-02

그래픽 디자이너 김영나의 ‘룸’

매주 금요일, 한 시간만 허용되는 베를린의 수상한 공간
명사로는 ‘베틀(직조기)’, 동사로는 ‘어렴풋이 보이다’라는 뜻을 가진 LOOM은 김영나의 주거 공간이자 작업실이다. 2022년 오픈한 이래 벌써 여섯 번째 프로젝트를 선보이는 프로젝트 스페이스이기도 하다. 상황과 목적에 따라 변화하는 이 작은 화이트 큐브는 김영나가 오랜 시간 막연하게 그려오던 공간의 실현체이기도 하다.
김영나. 사진 제공: 김영나

그래픽 디자이너로 커리어를 시작했지만 전시를 주로 하는 김영나에게는 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 따라다녔다. 디자인을 통해 표현하고 원동력으로 삼기에 스스로 디자이너라고 답을 했지만 요즘 그녀의 활동은 그 경계가 매우 모호하다. 얼마 전 두산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TESTER>를 마치고 베를린으로 돌아온 김영나 작가를 그녀의 공간 ‘LOOM’에서 만났다.

LOOM 챕터 0 오프닝. Photo: Siniz Kim

“미술관이나 갤러리를 관람할 때 우연히 혼자 있었던 경험 있으세요? 저는 그럴 때 굉장히 묘한 감정을 느꼈거든요. 늘 보던 작품인데 다르게 보이고 그 순간의 공기나 소리도 뭔가 달랐던 것 같아요.”

김영나는 전시 준비 과정 중 홀로 공간에 남아 있게 된 순간이나 팬데믹 때문에 텅 비어버린 전시장에서 느꼈던 감정에서 LOOM의 실마리를 찾았다. 매주 금요일, 한 시간 동안 단 한 건의 예약만 받는 독특한 운영방식은 여기에 기인한다. 짧은 인사를 건넨 김영나가 홀연히 사라지면 LOOM은 온전히 방문자만의 공간이 된다. 누군가는 전시를 심도 있게 관람하고 누군가는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의 책을 읽는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음악(김영나가 선곡한 플레이리스트)을 들으며 멍하게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작가의 주거공간이자 작업실이면서 누가 와서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그 어떤 공간도 될 수 있는, 다양한 기능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LOOM은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실험적 공간이다. 관찰자가 되어 기록을 남기는 김영나도 공간의 일부다.

LOOM 챕터 2 〈Found Composition〉 Photo: Siniz Kim
LOOM 챕터 2 〈Found Composition〉 Photo: Siniz Kim

LOOM은 지금 여섯 번째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호상근 작가의 개인전을 이번 프로젝트로 초대한 것. 종종 작품 구매를 문의하는 사람들 덕분에 김영나의 경험치에 갤러리스트도 추가됐다. 방문자에게 경험을 제공하지만 작가 스스로에게도 새로운 경험을 주는 의도된 기능 중 하나다. 갤러리 팩토리와 협업한 사월호텔 프로젝트를 소환했던 첫 번째 챕터 <The Room of a Dice>를 시작으로 <Found Composition>, <LESS>, <Workshop>까지는 모두 김영나가 가진 디자인 재료들을 확장하고 재조합, 재구성해 보여주는 방식이었다면 다섯 번째 챕터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기획되었다. 새로운 매체가 등장한 것이다.

LOOM 챕터 3 〈LESS〉 Photo: Siniz Kim
LOOM 챕터 3 〈LESS〉 Photo: Siniz Kim
LOOM 챕터 4 〈Workshop〉 Photo: Siniz Kim

“카펫을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만드는 과정도 흥미롭지만 이 공간에 뭔가를 제작해서 넣었을 때 다른 경험을 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떠올랐어요. 그것도 LOOM의 변주 중 하나거든요. 예를 들어 지금은 테이블이 구석에 있지만 이걸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사람들이 공간을 느끼는 방식이 달라지고 작업을 보는 관점도 달라지기 때문에 신체의 감각이 더해지면 어떨지 궁금했어요.”

LOOM 챕터 5 〈DOLPOOL〉 Photo: Siniz Kim

카펫 프로젝트의 이름은 <DOLPOOL>. 콘크리트로 가득한 삭막한 도시에서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바닥의 타일 사이에 피어난 이름 모를 잡초와 꽃들에서 디스토피아적인 아름다움을 느낀 김영나와 암스테르담 기반의 태피스트리 브랜드 쿠라토Kurato가 함께 모듈형 카펫을 제작했다. 타이포그래퍼 함민주도 협업해 ‘돌’이라는 한글을 벽화로 그렸다. 2015년 두산갤러리 뉴욕에서의 전시 이후 김영나는 평면과 인쇄에서 탈피해 공간과 텍스처로 디자인을 구현하는 새로운 방법으로 벽화를 택했다. 이번에는 스케치 없이 즉흥적으로, 심지어 여러 명과 함께 그리는 모험을 감행했다. 예상하지 못한 형태나 컬러의 조합에서 오는 즐거움은 덤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돌풀DOLPOOL 프로젝트는 방문자들이 바닥에 앉고 눕고 엎드리는 새로운 풍경을 연출해 냈다.

LOOM 챕터 5 〈DOLPOOL〉 Photo: Siniz Kim

“저는 많은 걸 쌓아놓고 버리지 못하는 성격이에요. 과거나 수집에 대한 집착이 강한 편인데 또 새로운 것에 호기심도 굉장히 많거든요. 좀 아이러니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것들이 서로 영향을 주는 것 같아요. 지금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가까운 미래의 것들이 왜 반짝일 수 있는가 보면 예전의 기억 때문인 것 같거든요. 저에게 LOOM은 무언가 연상되긴 하지만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 미래예요. 여기서라면 과거와 현재, 미래를 오가면서 새로운 시도를 하고 공간과 시간에 대한 이야기들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LOOM 챕터 6 〈Looming〉 Photo: Siniz Kim
LOOM 챕터 6 〈Looming〉 Photo: Siniz Kim
LOOM 챕터 6 〈Looming〉 Photo: Siniz Kim

장수연 객원 필자

▼ 김영나 디자이너의 작업 그리고 전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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