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24

“캔버스에 한 줄이라도 더 긋고 싶다”, 단색화 거장 박서보 화백 별세

고(故) 박서보 화백의 마지막 전시
한국 현대미술 단색화를 대표하는 기수 박서보 화백이 지난 14일 별세했다. 향년 92세. 평소 "캔버스에 한 줄이라도 더 긋고 싶다.", "아직 그리고 싶은 것들이 남았다."라고 말하며 작업을 향한 지치지 않는 열정을 보여 온 그였기에 갑작스러운 부고 소식은 미술계를 넘어 문화계 전반의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고(故) 박서보 화백 (사진 제공: 조현화랑)

묘법(猫法)의 창시자

고(故) 박서보 화백은 1931년 일제강점기 시절 태어나 광복과 한국 전쟁으로 이어지는 시대의 혼란을 몸소 겪었다. 이 때문에 초창기 그의 그림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단색화와는 사뭇 다르다. 전쟁의 참혹함과 실종된 인간성에 대한 분노를 그림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1960~70년대를 거치면서 그의 작업 세계는 전환기를 맞이한다. 이 시기 작가는 서구 추상화의 간접적 영향과 한국의 얼과 철학에 대한 급진적 해석을 더해 자신만의 고유한 창작 기법을 창조했다. 오늘날 그의 작품 세계를 상징하는 ‘묘법(猫法)’이 바로 그것이다.

Ecriture No. 200128, 2020, Pencil, Acrylic and Oil on Canvas, 40x55cm (사진 제공. 조현화랑)
Ecriture No. 200420, 2020, Pencil, Acrylic and Oil on Canvas, 40x55cm (사진 제공. 조현화랑)

묘법은 말 그대로 선을 긋는 행위를 말한다. 캔버스에 물감으로 밑칠을 한 뒤, 물감이 마르기 전에 연필로 선을 그리고, 다시 지우기를 반복한다. 마치 수행자처럼 쉼 없이 그리고, 지우고, 또다시 그리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반복적인 작업 행위를 통해 스스로를 낮추고 겸손을 추구하며 정제된 아름다움을 빚어낸다. 이처럼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하게 된 ‘묘법’을 두고서 그는 “무목적성으로 무한 반복하며 나를 비우는 작업”이라고 말한다.

조현화랑 해운대 전시 전경 (사진 제공. 조현화랑)
Ecriture No. 100928, 2010, Mixed Media with Korean hanji Paper on Canvas, 200x440cm

흔히 그의 묘법 작업을 초기, 중기, 후기 세 가지 시기로 구분하여 말한다. 초기 묘법은 연필로 묘법 작업을 했던 시기를 일컫는다. 연필 묘법은 둘째 아들이 글자 연습을 하던 중 지우고 쓰기를 반복하는 모습에서 영감을 얻었다. 1980년대에 이르러 ‘한지’라는 물성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제작된 작품은 중기 묘법 시기에 속한다. 캔버스 위에 한지를 바르고, 그 위에 물감을 발라 마르기 전에 긁거나 밀어내는 행위를 반복해 완성한다. 이를 반복하다 보면 한지에 날이 만들어지고, 선과 선이 골짜기처럼 표현된다. 후기 묘법은 다른 말로 색채 묘법이라고도 한다. 지난 2000년 동경 화랑에서의 개인전으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 후쿠시마 현의 반다이산에서 본 단풍 풍경으로부터 기인했다. 이후 그는 자연 속에서 발견한 색을 자신의 작품 안에 꾸준히 들여왔다.

Ecriture No.220913, 2022, Acrylin on Ceramic, 93.5x73.5cm
(왼쪽) Ecriture No.220901, 2022, Acrylin on Ceramic, 92.5×72.5cm
(오른쪽) Ecriture No.220907, 2022, Acrylin on Ceramic, 93.5×73.5cm

이러한 묘법의 매력을 살펴볼 수 있는 박서보 화백의 개인전이 부산 조현화랑에서 진행 중이다. 이제는 그의 마지막 개인전이 된 전시는 2020년대를 기점으로 제작되기 시작한 후기 연필 묘법을 최초로 소개한다. 아울러 디지털로 고인의 묘법을 재해석한 비디오 작품과 1000호에 달하는 연보라 묘법 대작이 함께 선보여 관객의 몰입감을 더한다. 이외에도 세라믹 묘법 6점, 대형 판화 작품 4점을 포함해 총 25점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조현화랑 달맞이 전시 전경 (사진 제공. 조현화랑)

“이번 전시가 마지막 전시가 될 것 같다.”

지난 9월 말 개인전을 위해 부산 조현화랑을 찾은 박서보 화백이 조현 전 조현화랑 대표에게 전한 말이다. 조현화랑과 박서보 화백의 인연은 오래되고 깊다. 1991년 박서보 화백의 전시를 연 이래 14회에 걸쳐 가장 많은 개인전을 연 화랑이기 때문이다. 조현 전 대표는 처음 갤러리를 열었을 때 이강소 화백의 추천으로 당시 홍대 앞 작업실을 둔 박서보 화백을 만났다. “당시 모든 작가들이 무서워했는데, 개인적으로는 박서보 선생님의 첫인상이 참 좋았어요. 그 앞에서 전시하고 싶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 오랜 세월을 함께 해 온 그녀는 박서보 화백을 이렇게 기억했다.

평생에 지금까지 살면서 선생님만큼 당당하신 분을 뵌 적이 없다. 세월이 지나면서 선생님과 같이 늙어가면서 느끼는 것은 자기 자신과 작품과 삶이 얼마나 당당하면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싶은 것이다. 확신이 있고, 작은 일에도 큰 일에도 성실하고 최선을 다하신다.

조현 前 조현화랑 대표

조현화랑 달맞이 전시 전경

그의 부고 소식을 두고 이러한 평을 봤다. “한국 현대미술의 한 시대가 저물었다.”그 정도로 그의 존재감은 남다르다. 묵묵히 반복을 실현해 온 수행자, 단색화의 아이콘, 동시대와 호흡한 시대의 어른. 혹여 부산에 간다면 오는 11월 12일까지 이어지는 고(故) 박서보 화백의 개인전을 놓치지 말자.

이정훈 기자

취재 협조 및 자료 제공 조현화랑

프로젝트
<故 박서보 개인전>
장소
조현화랑
주소
부산 해운대구 달맞이길65번길 171
일자
2023.08.31 - 2023.12.03
Art
이정훈
독일 베를린에서 20대를 보냈다. 낯선 것에 강한 호기심을 느끼며 쉽게 감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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